나이듦을 자연스레 받아들이자는 말을 많이 했다. 나이듦이 무슨 죄를 짓는 것도 아니고, 왜 애써 감추려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도 했다.
그런데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나이듦이 이상하게도 자랑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듦이 자랑이 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이루었어야 한다는 거창한 생각은 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사회에서 꼰대 소리를 들으면 안 되지 하는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나이 먹은 사람들 가운데 정말 나이값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고, 그들이 지금까지 먹은 밥값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나이듦이 결코 자랑일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나이듦은 시간이 지나서 그냥 몸의 노화가 진행되는 육체적인 문제로만 취급한다면야 사람이라는 존재, 모두가 겪어야 하는 일이니 별로 억울할 것은 없는데...
나이듦이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까지도 쇠하게 만들어버린다는 생각을 하니, 참으로 억울하다. 나만이 아니라 대부분 나이듦은 익어가는 것, 성숙되어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싶어하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서 육체는 자꾸만 뒤로 달아나고, 정신 역시 시대를 따라가지 못해 가만히 있어도 뒤쳐지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러니, 겉으로라도 나이들지 않았다고, 아직은 젊다고 외치고 싶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흰머리를 하고 직장 생활을 하면 대뜸 염색 좀 하라고 하는 말을 듣는다.
왜 그런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흰머리는 나이듦을 상징하고, 직장생활에서 흰머리로 대변되는 나이듦은 아주 고위직이 아니면 추함, 곧 나가야 함을 의미하기도 하나 보다.
그러니 기를 쓰고 흰머리를 감추려고 하지. 이것은 개인이 지닌 취향을 넘어서 사회적인 분위기가 아닐까 한다.
사회적 분위기, 나이 먹은 사람들이 나이값을 하는 모습, 지금까지 자신이 먹은 밥값을 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바뀌지 않을까?
이제 나이 먹은 축에 드는 나 역시, 밥값ㅡ나이값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이 시를 읽으며 생각해 보았다.
염색
나보다 앞서 세는 아내의 머리를
새벽에 염색해준다
안개가 피어오르듯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
모래톱의 흰 왜가리들처럼 외발로 서서 졸고 있는
흰 머리카락들, 고개를 들기 전에
깜장 물 들여 검은머리물떼새로 바꿔놓는다
잠시 잠깐 그렇게 속여두어야 한다
흰 왜가리 떼가 눈을 뜨고 제 몸빛을 찾아 두리번거릴 때까지
검은머리물떼새를 머리에 얹고
저 거리와 시장을 젊은 피로 누빌 아내를 위해
새벽에 하는 아내의 염색은
하느님도 눈감아주어야 한다
부처님이 머리 기른 제자를 두지 않듯이
박박 삭발해버린 미련은 늘 머리카락으로 치렁치렁해지는 것
깨닫는 머리와 흐느끼는 머리카락 사이에
써레질하듯 염색약을 비벼대는 빗 하나 들고
창밖을 보면
허공을 잘 빗으며 내리는 빗줄기,
늙지 않고 물들이지 않아도 될 머리카락이
참 길게도 끊어 내린다
유종인, 수수밭 전별기, 실천문학사. 2007년 초판 2쇄. 36-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