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시대만큼 목숨의 가치가 없는 시대가 있을까? 길지 않은 인생을 사는 인간들이 제 목숨 하나도 우연에 맡겨야 하는 시대가 되지 않았나.

 

도처에서 테러, 재난,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렇게 사람들의 목숨값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시대인데...

 

인간이 아닌,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을 제외한 다른 생명들은 어떤가? 이들은 인간에 의해 멸종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는가.

 

자기 종족이 병에 걸렸다는 이유만으로 죽음을 당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동물들... 인간의 삶터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어야 하는 식물들.

 

이런 생명들의 목숨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생각하고 있을까? 이런 목숨들의 값어치를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인간 본위로 살아가는 지금 이 시대는 결국 인간의 목숨값마저도 하찮게 여기게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 넘쳐나는 책들... 그 책들. 책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책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나로서는 가끔 책을 쌓아두면서 나무들의 목숨값을 내가 이렇게 지니고 있어도 되나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장철문 시인 역시 그런 생각을 했나 보다. 그의 시 '얼마나 많은 나무들이'를 보면 알 수 있다. 다만, 시인은 나무의 목숨에서 더 나아가 나무와 관련된 다른 생명들까지도 이야기한다.

 

얼마나 많은 나무들이

 

얼마나 많은 나무들이 쓰러졌을까?

얼마나 많은 벌레들이 집을 잃고

햇볕에 말랐을까?

 

한 뭉치에 백권씩 이백 뭉치의 책더미를, 아니

나무 등걸을

숲을

천장에 닿을 때까지 쌓는다

개미핥기의 입김만으로도 태풍이 되고

원주민 일부의 오줌발만으로도 노아의 홍수가 되는

보이지 않는 숨결들의

부서지고 으깨지고 표백되고 잉크가 찍힌

집을 쌓는다

 

이 중에 몇 권이 꼭 만날 사람을 만나

그를

얼마나 오랫동안 창가에, 혹은

길모퉁이에 세워둘까?

 

그 많은 교정지를 넘기면서도 듣지 못했던

환청을

책을 쌓으며 듣는다

 

얼마나 많은 새들이 어지럽게 날아올랐을까?

얼마나 많은 짐승들이 숲의 끝까지 달렸을까?

 

이슬 한방울로 하루치 양식이 넘치고

깊은 숲이 조율하는 바람구멍이 아니고는,

그 작은 파닥거림을

하늘에 비칠 수 없는 것들

 

얼마나 많은 숨결들이 여린 살과 노래를 잃었을까?

 

장철문, 바람의 서쪽. 창작과비평사. 1998년. 50-51쪽.

 

우리는 모두 남의 목숨으로 살아가고 있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미생물이든 우리들의 삶은 다른 생명체의 죽음에 기반하고 있다.

 

늘 그것을 생각하고 살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가끔은, 아주 가끔은 내 삶이 다른 생명들의 죽음 위에 있다는 생각을 하자.

 

그리고 다른 생명들을 바라 보자.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끼자. 그러면 약간이라도 생명파괴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장철문의 시집을 읽으며, 이 시를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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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9 08: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6-19 09: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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