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없이 살아온 나날들. 문득 멈춰 서서 나를 보게 되면 내 가슴 속에 누군가가 있다.

 

또 하나의 나. 그런 나는 잘 보이지 않는다.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안 보이지도 않는다. 분명 있다. 내 가슴속에 누군가가.

 

그 누군가가 걸어간다. 그냥 내 가슴 속을.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면 어느새 걸어가고 있는 그가 나인지, 내가 그인지 알 수가 없게 된다.

 

그렇게 늙어가고 낡아가고, 그와 나는 우리가 된다. 누군지도 모르면서 그냥 우리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삶이다. 수많은 '나들'을 만나는 것, '나' 밖에서도 나를 만나고, 내 안에서도 나를 만나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이지 않을까 한다.

 

가끔 물끄러미 거울을 보면 친숙하면서도 낯선 나를 발견한다. 거울 속의 그를 나라고 해야할지 잘 모를 때, 그에게 도대체 '넌 누구니?'라고 물어보기도 한다.

 

그가 누군지 알면서, 그는 또다른 나임을 알면서 그렇게 부러 질문을 한다. 홍영철의 시 '너 누구니?'를 읽는 순간, 이런 '나들'이 생각났다.

 

이 시는 이런 '나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특히 내 외부의 세계가 쓸쓸할 때는 더욱.

 

   너 누구니?

 

가슴속을 누가 쓸쓸하게 걸어가고 있다.

창문 밖 거리엔 산성의 비가 내리고

비에 젖은 바람이 어디론가 불어가고 있다.

형광등 불빛은 하얗게

하얗게 너무 창백하게 저 혼자 빛나고

오늘도 우리는 오늘만큼 낡아버렸구나.

가슴속을 누가 자꾸 걸어가고 있다.

보이지 않을 듯 보이지 않을 듯 보이며 소리없이.

가슴속 벌판을 또는

멀리 뻗은 길을

쓸쓸하게

하염없이

걸어가는

너 누구니?

너 누구니?

누구니, 너?

우리 뭐니?

뭐니, 우리?

도대체.

 

홍영철, 가슴속을 누가 걸어가고 있다. 문학과지성사. 2010년 초판 4쇄. 17쪽.

 

세상은 황량한데, 그 황량함 속에서도 나는 홀로이지는 않다. 바로 내 가슴속에 누군가가 있고, 그가 내 가슴속에서 걸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걸어가고 있음, 살아있음, 그 살아있음을 느낌으로써 나 역시 살아있는 것이다.

 

가슴속의 그에게 '너 누구니?'라고 묻지만, 이 너는 곧 나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우리 뭐니?'라고. 나와 그는 '우리'가 된다. 각자 독립된 '나들'이 화합하게 되면 그때 '우리'가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도 세상은 쓸쓸하다. 힘들다. 거칠다. 그런 세상에 나만 걸어가는 것은 아니다. 나 밖의 나와 내 안의 내가 함께 걸어간다. 우리들, 서로 뭐니? 도대체 뭐니?라고 질문을 하면서도 함께 간다.

 

그렇게 가는 순간만큼 우리는 살아 있다. 살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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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6 1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6-16 12: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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