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를 수락하는 순간, 시인과 독자는 같은 세계에 거주하게 된다. 반면 그 느낌의 세계에 입장하지 않는 사람에게 그녀의 시는 열리지 않는다. (신형철의 해설 중에서, 150쪽)

 

  모든 시는 초대장이다. 시인이 느꼈던 세계, 시인이 만든 세계에 함께 하자는 초대장.

 

  그러나 그 초대장은 쉬운 언어로 쓰여 있지 않다. 오히려 암호로 쓰여 있다고 해야 한다.

 

  암호문. 이를 해독해 내지 않으면 초대에 응할 수가 없다. 무어라 쓰여 있지만, 그것은 그냥 글자에 불과할 뿐이다.

 

  느낌의 세계, 그것을 여는 열쇠, 열쇠가 동봉되지 않은 초대장은 소용이 없다. 그냥 종이에 불과하다. 사라질.

 

김행숙의 시도 마찬가지다. 해설자는 김행숙의 시에서 사랑도 느끼고 느낌의 공동체도 발견했는데, 나는 열쇠를 찾지 못했다.

 

초대장을 받았는데 초대장을 읽지 못해 잔치집에 가지 못하는 상황, 그런 상황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그 잔치집에 가지 못해도 좋다. 나만의 조촐한 잔치를 하면 되니까.

 

시집의 처음 시를 가지고 잔치를 한다. 내가 나만의 느낌을 가지고 자족하는 잔치. 그것은 곧 시인의 초대장을 내 식으로 고치는 일이다.

 

제목은 '발'이다. 우리 몸에서 가장 밑에 있는 신체 부위. 땅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신체 부위. 온몸의 무게를 지탱해 주는 신체 부위. 가만히 있을 때도 있지만 주로 어디론가 가는 신체 부위. 그것이 바로 발이다.

 

그런 발이 "고울' 수가 없다. 발은 '미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발이 밉다고 사람들이 미운가, 아니다.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은 밉다. 그러나 그의 몸짓은 아름답다. 마찬가지다. 발이 미울수록 삶은 아름다울 수 있다.

 

가장 낮은 곳에 있는 발이 자신의 몸을 통해 삶을 아름답게 유지하는 것이다. 낮은 것들에 축복이 있으라. 반면 손은 높은 곳에 있다. 손을 위로 치켜들 때 손과 발은 가장 멀리 있게 된다. 손으로는 땅이 아닌 공중에 하늘에 떠 있다.

 

발이 고정되어 있다면 손은 자유롭게 움직인다. 시인은 바로 손이다. 시인이 바라보는 세계는 발이다. 그런 발의 세계, 추악한 세계, 비루한 세계일 수 있지만, 아니다. 그런 세계는 아름답다. 전체적으로 삶은 아름답다.

 

시인은 그것을 안다. 발과 손의 거리를.

 

 

  발이 미운 남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나의 무용수들, 나의 자랑.

 

  발끝에 에너지를 모으고 있었다. 나는 기도할 때 그들의 힘줄을 떠올린다.

 

  그들은 길다. 쓰러질 때 손은 발에서 가장 멀리 있었다.

 

김행숙, 이별의 능력, 문학과지성사. 2007년. 11쪽.

 

그래서 기도할 때, 흔히 기도할 때는 두 손을 모으게 된다. 발이 아니라 손에 집중하게 된다. 시인의 세계로 들어설 때 시인은 발을 떠올린다. '기도할 때 그들의 힘줄을 떠올린다'고 한다.

 

시인과 삶은 멀리도 있지만 '쓰러질 때 손은 발에서 가장 멀리 있었다'고 하지만 쓰러질 때 땅을 짚는 것은 손이다. 손은 결코 발에서 떨어질 수 없다. 그들은 같은 땅을 짚고 있다. 단지, 멀리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삶에서 떨어질 수 없다. 낮은 곳의 사람들을 가릴 수가 없다. 어떻게든 자신의 시로 불러들인다. 시에서 그들을 살아가게 한다. 아름답게.

 

하지만 시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멀다. 시를 통해 그들의 삶을 떠올리기는 힘들다. 그들의 삶을 이해하도록 하는, 함께 느끼고 사는 공동체로 불러들이는 초대장이기는 하지만 열쇠말을 풀지 못하면 갈 수가 없다.

 

멀리 있는 것이다. 이 멂. 하지만 끝은 아니다. 끝이 아니기에 손이 땅을 짚을 때 다시 발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

 

하여 우리는 쓰러져봐야 한다. 시인의 초대장을 읽을 수 있기 위해서는. 땅에 손을 짚어봐야 한다. 발과 같은 위치에 놓아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똑같을 수는 없다. 손과 발이 똑같은 땅을 짚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만, 비슷한 위치에 놓일 수는 있다. 그것이 바로 시의 세계에 들어가는 길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한다.

 

길고 멀리 있지만 만날 수 있는 거리, 시와 현실, 시인과 독자, 시인과 현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이 시를 통해서 하게 됐다.

 

김행숙의 초대장을 받고 제대로 읽어내지 못해 잔치집에 가지는 못했지만, 나만의 잔치, 내 스스로 자족하는 잔치, 이 '발'이라는 시로 한다.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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