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이라는 작열하는, 밝은, 뜨거운 대상을 생각하면 한여름, 한낮, 절정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무언가 정점에 있었을 때 태양을 연상한다. 그런데, 이 시에서 말하는 '태양의 연대기'는 그렇지 않다. 절정이 아니다. 절정에 이르지 못한 또는 절정을 지난 시기다.

 

  달로는 6월이다. 여름이 시작한다. 우리의 삶이 절정에 도달하려는 바로 그 시작 지점, 시는 그때를 말한다. 그러면 희망이 넘쳐야 하는데, 아니다. 시간은 19시 15분. 이건 뭔가, 해가 질 때 아닌가.

(장석원, '태양의 연대기'에 나오는 시간들)

 

  태양을 이야기하면서 절정을 피해간다. 어쩌면 인생은 절정에서는 할 이야기가 없는지도 모른다. 한참 절정에 무슨 이야기가 필요하겠는가.

 

그래서 우리에게 이야기가 필요한 시기는 절정을 바라는 때거나 절정을 지나 그 때를 회상할 때이다. 이야기가 있다는 것, 자신의 삶에서 한 발 물러나 있다는 것이다.

 

이런 태양을 지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때,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는 시가 바로 '저녁의 봉인'이다. 저녁은 어둠으로 모든 것을 봉인한다. 그러나 이 봉인이 풀릴 때가 있다. 바로 달빛.

 

태양이 아니라 달빛이다. 태양은 삶을 살아가게 한다면, 그래서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없다면, 달빛은 삶에서 살짝 빗겨나 자신을 바라보게 한다.

 

삶의 봉인을 푼다. 자신의 인생을 살아온 태양, 그 태양이 지자 어둠으로 봉인한 삶을 달빛이 풀어낸다. 그 달빛으로 내 삶만이 아니라 다른 존재들도 바라보게 된다.

 

저녁의 봉인

 

나를 따라온 길이

어둠이 잠가버린 길이

시간의 계단처럼 박명 속에 묻혀

디딜 곳 없습니다 만신에 멍들어

걸어온 내가 사라진 나를 쳐다봅니다

손가락 사이로 사라진 듯

발자국 밑으로 녹아든 듯

호흡이 단절된 순간마다 부서진 듯

숲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달이 어둠에 빗살을 긋자

떡갈나무 밤나무 입을 벌립니다

죽은 자들이 눈을 뜹니다

피가 돌기 시작합니다

어둠의 사슬을 풀고 아버지가 나를 기다립니다

할아버지 무덤을 찾아가던 그날처럼

소처럼 느릿 걸어갑니다 기울어집니다

나무 아버지 걸어와 환하게

웃으며 나를 만집니다

 

장석원, 태양의 연대기, 문학과지성사, 2008년. 130쪽.

 

치열한 삶의 한복판에서 벗어나 달빛으로 봉인 해제된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던 존재를 드디어 만나게 된다. 나는 나만이 아니라 죽은 존재들과 살아있는 다른 존재들이 모두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존재다.

 

그런 존재들 깨닫게 해주는 것이 바로 태양이 진 뒤의 어둠과 달빛이다.  어둠 속에서 봉인을 해제해주는 달빛. 그런 달빛을 볼 수 있는 여유, 그것이 우리 삶에서 필요하지 않을까.

 

무작정 앞만 보고 달려온 하루하루에는 저녁이 되면 그냥 삶은 봉인이 되어 버린다. 봉인을 풀 수 없다. 그래서 반대로 해야 한다. 어둠이 지금까지의 신산한 삶을 봉인하도록 해야 한다.

 

내 삶을 다른 존재들과 이어줄, 그들과 함께 하고 있음을 인식하게 하는 봉인 해제의 열쇠, 달빛이 우리 삶에 들어오게 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작열하는 태양 아래,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냥 삶을 소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삶이 자신을 봉인해 버리는 줄도 모르고서, 또는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이제는 그래서는 안 된다. 우리가 봉인해야 할 삶은 멈추지 못하고 앞으로만 내달리는 삶이다. 그 삶은 봉인하고, 좌우를 보며 느릿느릿 걸어가는 그런 삶을 풀어내야 한다.

 

은은한 달빛이 필요한 시점이 바로 지금이 아닐까 한다. 저녁이 있는 삶이든, 칼퇴근을 하는 삶이든. 이 시를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으니, 이건 지나친 오독(誤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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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7-05-07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니 오늘 지나는 태양의 자오선을 따라가는 기분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