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인의 시답게 의미가 한 번에 파악되지 않는다. 시에 쓰인 언어들이 하나의 의미와 대응하지 않고 여러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이렇게 저렇게 해석이 될 수 있는 시들이 많이 있고, 언어 유희라 할 수 있는, 발음의 유사성으로 한글을 한자로 바꾸어 표현한 시도 있다.

 

  대체로 시들이 길어서 읽는 시가 되지, 마음을 울리며 외울 수 있는 시라고 할 수는 없는데... 그럼에도 한 시가 마음에 쏙 들어왔다.

 

  참,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그런 시인데... 이 시를 읽으며 '오르가즘'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빌헬름 라이히는 오르가즘을 제대로 향유하지 못하면, 즉 오르가즘을 느끼지 못하고 성년이 된 사람들은 남들 위에 군림하여 지배하려고 한다고 했는데...

 

그래서 오르가즘을 막는 사회에서는 파시즘이 등장한다고 했는데... 청소년기에 오르가즘 느끼고 욕구를 분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는데... 욕망, 욕구를 밖으로 분출하는 것, 안으로 쌓아두다가가는 그것이 자신뿐만이 아니라 남에게도 피해를 주게 된다는 주장을 했는데... (빌헬름 라이히, 오르가즘의 기능 참조)

 

어쩌면 우리 사회는 이런 오르가즘을 극도로 억압하고 있는 사회 아닌가 하는 생각. 특히 청소년들의 오르가즘은 학대에 가까울 정도로 억압받고 있다는 생각.

 

이렇게 억압받고 지내는 학생들의 모습이 학교 폭력이나 집단 따돌림 또는 다른 일탈행위로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특히 학생들이 입고 있는 교복은 현대판 정조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

 

교복을 입고 있다는 이유로 자신의 머리를 염색할 자유도, 파마를 할 자유도 박탈당하고, 자신의 얼굴에 화장품을 바를 권리도, 귀를 뚫을 자유도 박탈당하고 지내는 학생들이 어떻게 오르가즘을 발산하면서 성장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 놀 권리 역시 박탈당하고 있으니, 이래저래 학생들은 오르가즘이라는 것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신체 표현의 자유도 교복이라는 정조대로 억압당하고 있는데, 성에 관해서랴. 물론 성적인 오르가즘만이 문제는 아닌데... 우석훈의 "88만 원 세대"의 시작 부분이 '청소년에게 섹스를 허하라'는 말로 되어 있는데, 이것을 떠나서, 오르가즘이란 자신의 욕구를 제대로 분출할 때 느끼는 감정이라고 하면,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성이든 다른 면이든 오르가즘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동의하게 된다.

 

오르가즘을 느끼는 세상, 그런 세상이 바로 '무릉도원'이 아닐까. 그것이 이상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이때 오르가즘은 나만이 아니다. 상대가 희열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상황, 그래서 나 역시 즐거움을 느끼는 상황, 이것이 진정한 오르가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바로 김경주의 '몽유, 도원'이란 시를 읽으면. 어쩌면 이렇게 오르가즘을 생각하게 하는데도 다른 방향에서 생각하게 하는 시를 쓸 수 있을까라는 감탄을 자아내게 되는데...

 

몽유, 도원

 

  오늘 따라 어쩐지 나는 그걸 하고 싶다

 

  귀이개를 가지고 귀를 팔 때

  몇 번 넣어 본 구멍이라고

  귀이개를 그것처럼 밀어 넣는다

 

  보이지 않지만, 도도하게 구멍에 대해 가지는 그 구체성,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 구멍에 대한 상상력은 의외로 선명하다 넌지지 닿고 있다는, 어떤 곤경을 긁어내고 있다는, 그 시원한 질감으로부터 뭉게뭉게

 

  귓밥이 흘러나온다 어둠 속에서 파도

 

김경주, 시차의 눈을 달랜다, 민음사, 2009년. 70쪽

 

기가 막히지 않는가. 머리 위에서 벌어지는 이 오르가즘의 향연. 보이지 않아도 서로를 알고 느낄 수 있는 관계. 내가 분출하는 것이 아닌 상대가 분출하게 하는 배려. 이것이 바로 오르가즘 아닌가.

 

이런 오르가즘 사회는 행복한 사회, 바로 우리가 꿈 속에 그리는 이상향 아닌가. 그렇게 나의 오르가즘이 너의 오르가즘이 되는 상황, 그래서 우리가 오르가즘을 느끼게 되는 그런 상황, 몽유, 도원.

 

상대를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자신의 오르가즘만을 분출시키는 그런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다. 나만을 바라보는 사회와 우리를 바라보는 사회는 이 시집에서 주로 나오는 단어인 '시차(時差)'에 해당한다.

 

바로 '시차(時差)'가 '시차(視差)'이므로. 우리는 이런 시차(時差, 視差)를 인정해야 서로의 오르가즘을 느낄 수 있다.

 

시차(時差, 視差)를 인식하는 순간, 나만이 아닌 남을 생각하는 자세를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는, 특히 요즘에, 김경주의 시집 속에서 발견한 '몽유, 도원'이란 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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