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누구에게나 소원이 있다. 특히 아이들에게는 더.
제목이'위시'다 우리말로 하면 '소원'이다. '소망'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고. 가정이 해체되어 이모가 살고 있는 시골로 온 한 소녀 '찰리'. 그녀에게 시골은 따분한 곳이다. 그리고 잠시 머물다 갈 곳이다. 결코 이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소녀는 계속 무언가 소원을 빌 빌미가 있을 때마다 소원을 빈다. 그 소원을 비는 모습이 재미있다. 그런데 그 소원이 무엇인지 나오지 않는다.
소원을 빌 때는 수없이 많다. 여러 조건들이 생겼을 때 찰리는 꼭 소원을 빌지만, 그 소원을 이야기하면 안 된다. 소원은 남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찰리가 절실히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집요하리만큼 찰리는 소원을 빈다. 그만큼 절실하다는 얘기다. 그 소원이 무엇인지 소설을 읽어가면서 우리는 짐작하고, 또 나중에 알게 된다. 결말에 찰리의 소원이 나오니까. 그 전까지는 늘 소원을 비는 찰리의 모습을 보게 된다.
2, 도대체 이런 가정이... 이런 가정을 만나면...
아빠는 감옥에 가 있고, 엄마는 거의 폐인처럼 지내고, 언니는 곧 고등학교를 졸업할 거라서 친구 집에서 기거하며, 미성년자인 찰리만이 보호자가 필요해 이모네 집으로 온다. 가족 해체의 전형이다.
아빠는 쌈닭이다. 툭하면 싸운다. 그래서 감옥에 가 있다. 감옥에 가 있기 전에 집에서 보여준 모습은 엄마와 툭하면 싸우는 모습이었다. 여기에 사랑은 없다. 도대체 이런 가정이 어떻게 유지되는가.
가정이 해체된 소녀, 찰리는 무언가 '분노'로 가득차 있다. 자신이 잘하는 거라고 뽑은 것 중에 사실이라고 한 것이 바로 '싸움'이니, 자신을 방어하기에 급급한 소녀가 바로 찰리다.
다른 말로 하면 자신감의 결여, 그리고 피해의식으로 꽉 차 있다 할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집안에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을테니. 아빠의 별명은 쌈닭이고 엄마도 일이 있을 때마다 야단만 쳤으니, 누구에게 칭찬을 받아본 일이 별로 없는 찰리였다.
그런 찰리에게 새 가정이 생겼다. 처음엔 방어기제가 작동한다. 그 가정은 잠시 머물다 갈 가정이다. 학교 역시 마찬가지다. 스쳐지나가는 곳, 그런 곳에 정을 둘 수가 없다.
여기에 친구가 된 하워드의 가정은 그야말로 찰리의 가정과는 정반대다. 시끌벅적하고 사고가 끊이지 않지만 그곳에는 사랑이 있다. 가족들이 사랑으로 똘똘 뭉쳐 있다. 그것이 찰리의 온몸에 그대로 전달이 된다.
이제 찰리는 전혀 다른 가정을 경험하게 된다. 자신이 원하는 가정은 어떤 것인가? 단지 과거로 돌아가는 가정인가? 아니면 이곳에서 경험한 사랑이 넘치는 가정인가. 답은 우리가 알고 있다. 찰리 자신도 알고 있다. 비록 말을 하지 않지만... 마지막에 가서야 답이 나오지만.
3. 정을 줄 수 있는 아이는 사랑을 받을 수 있다
어떻게 정을 줄 수 있겠는가. 찰리가. 어려서부터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아이는 사랑을 줄 줄 모른다. 자신의 감정을 남에게 어떻게 전달하는지 모른다. 제대로 전달하려 해도 그것이 잘 안된다.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그 오해가 결국 또다른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그래서 정을 받지 못한 아이는 냉혹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자기 표현에 서툴기 때문이다.
이런 찰리에게 하워드라는 절름발이 친구가 생긴다. 무언가 찰립만큼 결핍된 것이 있는 존재가 찰리 곁에 나타난다. 그때문에 찰리는 하워드를 멀리하지 않는다. 하워드가 자신과 완전히 다른 존재라는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절름발이로 학교에서는 왕따라 할 그 아이가 활달하게 지내는 것, 남들이 놀려도 전혀 노여워하지 않는 것, 그리고 찰리에게 다가와 말을 걸고 함께 지내려 하는 것에 찰리도 조금씩 마음을 연다.
또한 이모인 바서와 이모부인 거스 역시 찰리를 진심으로 대한다. 사랑으로, 잔소리보다는 사랑을 먼저 보여준다. 그런 점이 방어기제로 똘똘 뭉쳐 있던 찰리의 마음을 조금씩 열어간다. 여기에 찰리의 마음을 열게 하는 결정적인 존재, 위시본이 등장한다.
떠돌이개에게 찰리는 위시본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그 개를 결국 자신의 개로 만든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야단만 맞고 싫은 소리만 들은, 그래서 남들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경험을 하지 못한 찰리에게 새로운 경험을 안겨준다.
사랑할 존재가 있다는 것, 그것은 사랑을 한다는 것, 사랑을 한다는 것은 곧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것, 거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이모인 바서와 이모부인 거스에게 받은 찰리, 또 하워드에게도 친구가 되게 해달라는, 그리고 이곳에서 함께 지내게 해달라는 소원에 대해 들은 찰리.
이제 자신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 여기에 개인 위시본에게는 더욱 필요한 존재가 된 찰리이니 자신의 과거와 결별할 준비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4. 소원은 결국 이루어진다. 저절로가 아닌 노력으로.
과거와 결별, 새로운 가정의 탄생. 그곳에서 사랑을 받고 사랑을 줄 줄 아는 존재로 거듭나는 찰리. 그 과정이 참으로 유쾌하게 전개되고 있다. 참 비참한 상황이어야 하는데도 지긋이 웃음이 머금어질 정도로 찰리의 행동에 공감하게 된다.
소설이 전개될수록 찰리는 이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줄 알게 된다. 다른 사람과 소통을 할 수 있다는 거다. 소통하는 것, 사랑을 줄 수 있고,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거다. 그 과정이 결코 짧지 않다. 쉽지 않다.
그러나 이모네 가정의 무조건적 사랑, 하워드와의 만남, 위시본이라는 떠돌이개에게 주는 사랑. 이미 찰리는 변해 있다. 이제는 사랑하는 가족을 만들 일밖에 없다.
그 소원, 이루어져야 한다. 얼마나 찰리가 바라는 소원인가. 책 제목이 그래서 '위시'다. 떠돌이개에게 붙여준 이름도 '위시본'이다. 닭에게 있다는 V자형의 뼈, 그 뼈를 양쪽에서 잡아 긴 쪽을 잡은 사람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찰리는 위시본을 잡아당긴 결과 긴 쪽을 지니게 된다. 소원을 이룰 수 있는 준비는 끝났다. 여기에 자신을 따르는 개 '위시본'까지 있지 않은가.
5. 소설은 재미있어야 한다
청소년 소설은 어떤 교훈을 주려고 해, 주제가 재미를 압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소설은 아이들에게 다가가지 못한다. 주제가 강한 소설, 학교에서 지긋지긋하게 배우는 도덕과 무엇이 다른가.
우선 소설은 재미있어야 한다. 이 점에서 이 소설은 성공했다고 본다. 사건 전개가 짧막하게 그리고 빠르게 전개된다.
찰리가 곤경에 빠져 있을 때도 이상하게 슬픔보다는 웃음이 먼저 나오게 된다. 비극을 희극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우리나라 고전소설에서 보이는 '해학'이 넘쳐난다.
그래서 웃으면서 읽게 된다. 또 빠른 전개에 지루할 틈 없이 읽게 된다. 그러니 재미를 느끼면서 읽는다. 읽은 다음에 무언가 마음에 남는다. 그러면 된다.
특히 가정에 대해서, 한 아이에게 가정이 얼마나 소중한지, 소설을 읽는 사람들 자신의 가정을 돌이켜볼 수 있게도 되기 때문에... 더욱 좋다.
청소년들, 아마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만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을.
덧글
출판사의 서평이벤트에 응모해서 당첨이 되었다. 책을 가제본 판으로 받아 읽었다. 재미있는 책이었고, 즐거운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