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 백남준 - 아내 구보타 시게코가 말하는 백남준과 함께한 삶, 사랑, 그리고 예술
구보타 시게코 지음, 남정호 옮김 / 이순(웅진)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백남준.

 

그의 이름을 들어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아니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더 적을지도 모른다. '비디오 아트'라는 분야를 창시한 세계적인 미술가. 우리나라 사람으로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린 몇 안 되는 예술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비디오 아트에 대해서는 솔직히 잘 모른다. 어떤 감동을 받은 적도 없다. 그냥 거대한 전자기기들의 모음이라는 단순한 생각만 했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설치되어 있는 '다다익선'을 보고서도 어떤 감흥도 받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기만 했다.

 

그만큼 그의 예술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니 그의 개인사에 관심을 가질 일도 없었다. 하지만 백남준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알고 싶었다. 내 맘에 들지 않는다고 그가 세계적인 예술가가 아닌 것은 아니니까.

 

이제는 세상을 뜨고 없는 그지만, 그의 작품은 세계 미술관에 남아 그를 기억하도록 하니 말이다. 그리고 이 책은 그의 아내인 구보타 시게코와 우리나라 기자의 합작품이라고 보면 된다. 합작품이라지만,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화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내인 구보타 시게코이다.

 

구보타 시게코.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백남준의 아내가 일본인이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있지만, 아내가 누구인지는 관심 없었다. 그의 아내가 그와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예술가일 거라는 생각은 더더욱 하지 못했다.

 

부부가 모두 예술가일 때 주로 남편 쪽은 유명하고, 아내 쪽은 묻히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에서 오노 요코-백남준과 친구였다고 한다-를 아는 사람보다는 그의 남편이었던 비틀즈 멤버인 존 레넌을 더 잘알고 있듯이, 백남준을 비디오 아티스트로 알고 있지만, 그의 아내 구보타 시게코를 비디오 아티스트로 알고 있는 사람은 우리나라에는 거의 없다.

 

이 책의 공동저자인 남정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 책 프롤로그에서 그의 글을 읽어보면 구보타 시게코라는 예술가, 백남준의 그늘에 가려버리는 예술가가 아니다.

 

미국의 뉴욕 현대미술관에 백남준의 작품과 같은 숫자의 작품을 보관하게 하고 있는 작가, 구보타 시게코... 그가 들려주는 백남준과 그의 예술 이야기.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백남준이라는 사람을 가장 가까이서 접한 사람을 통해서 듣게 되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사적인 내용들도 이 책에 많이 나온다. 백남준의 예술세계 뿐만이 아니라 인간 백남준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이기도 하다.

 

시게코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은 백남준의 기사를 보고, 그 기사에 난 사진을 보고 백남준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겼다고. 그를 자신의 남자로 만들고 싶었다고.

 

'스물일곱 살에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는 별처럼 멀리 있는 예술가였다. 남자로서도 좋아했지만 예술가로도 흠모했다. 저렇게 빛나는 남자를 어떻게 잡을 수 있겠느냐고 친구가 물었을 때, 나 역시 치열한 예술가가 되어 그에게 닿겠노라고 다짐했었다. 그의 연인으로, 그리고 아내로 살아온 지난 40년은 그의 예술적 동반자가 되기 위한 열망과 정진의 시간들이기도 했다. 때론 고통스러웠지만, 더 큰 희열이 있었기에 포기할 수 없었다.' (362-363쪽)

 

그리고 그를 자신의 남자로 만드는데 너무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같은 예술가 동료로서 만남을 유지하기는 하지만, 그것도 일본도 아닌 미국에서, 백남준에게는 가정은 관심 밖의 일. 결국 다른 남자와 결혼해 살다가 헤어지고 다시 백남준에게로 돌아간 시게코.

 

헤어짐과 만남의 과정에서 백남준은 어떤 결정도 하지 않는다. 오로지 시게코가 결정한다. 그리고 그 결정대로 백남준은 따른다. 어린 시절 전쟁으로 일본으로 독일로 미국으로 세계를 유랑하다시피 한 백남준에게 한 곳에 머문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한 여자에게 매인 생활을 하고 싶지 않았으리라. 그래서 시게코와 함께 살면서도 결혼은 하지 않는다. 사실상의 혼인관계 생활을 한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이는 시게코도 마찬가지다. 백남준과 함께 있으면 되니...

 

이런 그들이 공식적으로 결혼을 하게 되는 계기는, 바로 시게코의 병이다. 여자로서는 치명적인 병. 낯선 타국에서 가난한 예술가들이 걸리면 치료하기 힘든 그런 시절, 백남준은 시게코와 결혼식을 올리고, 시게코가 치료하게끔 한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순간, 그들은 함께였던 것이다. 그리고 함께 삶. 함께 하는 예술가의 삶. 물론 앞에서 인용한 시게코의 말처럼 백남준의 예술 활동으로 인해 시게코는 손해를 많이 본다.

 

여전히 가부장적인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서양 예술가 부부들 역시 마찬가지다. 여성보다는 남성 쪽이 좀더 활동하고 여성은 묻히는 경우도 꽤 있었으니... 그렇다고 시게코가 예술 활동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서로에게 영감을 주고 보완을 해주는 예술 동료로서 생활하게 되는 것이다. 백남준 쪽이 좀더 혜택을 보았다 할지라도 시게코는 그에 대해서 큰 불만을 지니지는 않는다. 그것을 앞에 인용한 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체계적인 미술 공부를 하지 못한 백남준에게 체계적인 미술 공부를 한 시게코는 정말 좋은 동반자였을 것이다. 자신의 부족함을 메워주는 동료.

 

그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다음의 일들은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더이상 예술활동을 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접고, 그는 그 와중에도 예술활동을 한다. 마지막 열정을 불사른 것이다. 그리고 죽음.

 

이 과정을 글로 풀어낸 책. 그들의 사랑과 예술이 마음 아프게 다가온다. 그냥 전위예술가라고, 나와는 동떨어진 예술가라고 생각했던 백남준을 내 곁으로 오게 만들어준 책이다. 그를 좀더 이해할 수 있게 해준 책이라고 할까.

 

내가 읽은 책은 2010년 판인데, 2016년에 다른 판으로 다시 이 책이 나왔다고 한다. 그 사이 백남준의 부인인 구보타 시게코 역시 세상을 떴다고 하고. 2015년에.

 

이 책에 '야곱의 사다리'라는 예술 작품이 나온다.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 백남준의 예술작품 이름이기도 하지만, 백남준과 시게코가 함께 올라간 사다리이기도 하리라. 두 분이 하늘에서 서로에게 영감을 불어넣으며 지내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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