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만 가지고 패러디를 하면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몇년을 먹었다' 정도가 되려나.

 

이름으로 인해 권세를 부릴 수 있는 시대라니... 이 2000년대에. 그럼에도 호가호위(狐假虎威)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이름은 자신의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의 이름으로 사는 것은 한때일 수밖에 없다. 그 한때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만남이 아름답지 못하게 끝난다.

 

남의 이름을 이용하여 살아가야 하는 사람, 그러니 자신의 이름조차도 자주 바꿀 수밖에 없고, 그런 사람의 말로는 그야말로 추악함 그 자체다.

 

시에서 말하는 것처럼 글의 만남은 아름다워야 했으나, 글 역시 추악한 만남을 할 수 있음을 목격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에고. 시인은 절대로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을텐데...이런 의도로 쓰지 않았을텐데...

 

그냥 이렇게 글과 글이 추악하게 만나고, 이름이 권세를 부리게 한 만남이 현실에 있었으니, 이런 만남이면 안 된다. 최소한 남의 이름은 며칠은 먹을 수 있게 해줄 수 있으나 이렇듯 평생을 떵떵거리고 살게 해서는 안 된다.

 

남의 이름으로 떵떵거리며 살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런 만남은 결코 아름다워질 수 없다. 그런 만남은 추악할 뿐이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할 수 있다 오늘 저녁부터 바람이 차가워진다거나 내일은 비가 올 거라 말해주는 사람들을 새로 사귀어야 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의 자서전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익숙한 문장들이 손목을 잡고 내 일기로 데려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박 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2015년 1판 15쇄. 55쪽.

 

글의 만남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만남이 아름다워야 한다. 글과 사람이 따로 놀 수는 없다. 아무리 보기 좋고, 듣기 좋은 문장이라고 하더라도, 삶이 아름답지 않으면 좋은 문장이 아니다.

 

결국 시인이 말하는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는 표현은 우리의 만남 역시 아름다워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이라고 하는 것은 남의 이름으로 먹고 살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이야기한다.

 

어쩔 수 없는 현실, 그것은 순간이어야지 영속적이어서는 안 된다. 아름다운 만남은 이익으로 만나는 관계가 아니라, 그것을 내려놓고 만나는 관계이어야 한다.

 

그때서야 이렇게 아무런 욕심없이 더 머물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기억을 하지 않으려 해도 만남에서 어쩔 수 없이 머물러야 하는 관계... 그렇다고 어떤 이익이 개입되지 않는 관계. 아름다운 관계.

 

다음 시에서 만날 수 있다.  

 

문병

 - 남한강

 

당신의 눈빛은

나를 잘 헐게 만든다

 

아무것에도

익숙해지지 않아야

울지 않을 수 있다

 

해서 수면(水面)은

새의 발자국을

기억하지 않는다

 

오래된 물길들이

산허리를 베는 저녁

 

강 건너 마을에

불빛이 마른 몸을 기댄다

 

미열을 앓는

당신의 머리맡에는

 

금방 앉았다 간다 하던 사람이

사나흘씩 머물다 가기도 했다

 

박 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2015년 1판 15쇄. 80쪽

 

이렇게 아름다운 만남이 있을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시가 삶과 만나는 장면이 아닐까 한다. 따스한 만남... 마음이 편해지는, 시 속에서 마음을 놓아버리는 그런 만남. 이때는 글과 마음이 만나는 것이다. 글과 마음의 아름다운 만남.

 

그것이 바로 시다. '지록위마(指鹿爲馬)'라고 하는 글과 사람이 추악하게 만나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그런 말들이 권세와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여 말들로 문장들로 추악해진 만남들을 정화해야겠다. 박 준의 이 시집에서 이 시들을 읽으며 글과 마음이 만나는 아름다운 만남을 생각하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