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막힌 표현에 어찌 감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시인이란 자고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따스한 마음을 품고 대상을 대할 수 있는 시인이 있다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

 

 차가움의 대명사인 얼음을 따뜻하다고 표현했다. 그런데 그 따뜻하다는 표현이 엉뚱하지가 않고 가슴에 와 닿는다. 그렇다, 얼음은 이렇게 따뜻하다. 그 표면만을 보고 얼음을 차가움의 대명사로 여기고 있었다니.

 

 어떤 대상이든 한 면만 있지 않다는 사실, 다른 면도 있으니 다른 면도 보아줄 줄 알아야 한다는 사실.

 

 그러다 이런 눈을 지닌 사람이 시인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겨울을 대표하는 '눈' 역시 차가움 보다는 따스함이라고 노래한 시인들도 있지 않은가.

 

윤동주는 눈을 추위를 덮어주려는 이불에 비유했었고, (윤동주의 '눈') 안도현은 눈 중에서도 '함박눈이 되자'고 했었다. 함박눈이 되어 '편지'가 되고 '새 살'이 되자고... (안도현, '우리가 눈발이라면')

 

여기에 몇 해 전에 인기를 끌었던 영화 '겨울왕국'을 생각해 보자. 겨울왕국의 또다른 주인공은 '엘사'는 모든 것을 얼리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엘사는 자신의 능력을 두려워한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까 봐. 이것은 통상 우리가 얼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런 엘사도 나중에는 자신의 능력이 사람들을 위해서 쓰일 수 있음을 깨닫는다. 사람들이 즐거워할 수 있게 자신의 능력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힘으로 가능해졌다.

 

얼음이 차가움, 두려움에서 따스함, 즐거움, 사랑으로 변해 가는 과정, 그것이 주인공 엘사를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고 보는데...

 

시인 박남준은 '따뜻한 얼음'이라는 시에서 얼음의 따스한 면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아, 정말, 이렇구나, 무릎을 탁 칠 정도다.

 

 따뜻한 얼음

 

옷을 껴입듯 한겹 또 한겹

추위가 더할수록 얼음의 두께가 깊어지는 것은

버들치며 송사리 품 안에 숨 쉬는 것들을

따뜻하게 키우고 싶기 때문이다

철모르는 돌팔매로부터

겁 많은 물고기들을 두 눈 동그란 것들을

놀라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얼음이 맑고 반짝이는 것은

그 아래 작고 여린 것들이

푸른빛을 잃지 않고

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겨울 모진 것 그래도 견딜 만한 것은

제 몸의 온기란 온기 세상에 다 전하고

스스로 차디찬 알몸의 몸이 되어버린 얼음이 있기 때문이다

쫓기고 내몰린 것들을 껴안고 눈물지어본 이들은 알 것이다

햇살 아래 녹아내린 얼음의 투명한 눈물자위를

아 몸을 다 바쳐서 피워내는 사랑이라니

그 빛나는 것이라니

 

박남준, 적막, 창비. 2006년 초판 5쇄. 14-15쪽.

 

'쫓기고 내몰린 것들'을 껴안아 주는 얼음, 얼음은 그 차가움으로 인해 다른 존재들이 작고 약한 것들을 더이상 괴롭히지 못하게 막아주고 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이제는 자신의 역할이 끝나야 함도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얼음이 따뜻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햇살 아래 녹아내린 얼음'이 된다. 봄이 왔는데도 녹지 않고 버티고 있으면, 얼음은 자신이 사랑하고 보호해주려 했던 것들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라고 행복하게 사는데 장애가 될 뿐이다.

 

얼음은 그것을 안다. 보호해야 할 때와 가야할 때. 그래서 얼음은 '맑고 반짝이는' 것이다. 차가운 겨울에 밖의 차가움을 자신이 다 받아들여 자신도 차가워 보이지만 속으로는 더 작은 것들을 보호해주고 있는, 따스한 봄이 오면 자신을 녹여 그들을 세상 밖으로 내보내주고야 마는 얼음.

 

그런 얼음을 어찌 따스하지 않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얼음은 그래서 '따뜻한 얼음'이다.

 

이제 곧 겨울이 다가온다. 매서운 추위가 닥칠 것이다. 이미 계절 말고도 혹한의 겨울을 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 사회가 겨울에 접어든 지가 꽤 오래 되었다. 

 

우리 사회에도 얼음이 많이 있다. 얼음 속에서 우리는 간신히 숨을 쉬면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봄이 왔는데도 얼음이 봄을 거부하고 계속 존재한다면, 그래서 봄을 늦춘다면 그것은 '따뜻한 얼음'이 아니라 우리를 괴롭히는 '차가운 얼음'일 뿐이다.

 

우린 충분히 얼음을 경험했다. 이제는 그 얼음을 녹여야 할 때다. 얼음이 '차가움'의 대명사가 아니라 '따뜻함'을 뜻할 수도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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