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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본 이 거리를 말하라 - 서현의 우리도시기행
서현 지음 / 효형출판 / 1999년 9월
평점 :
절판
한적한 시골길을 걸어 보라.
마치 자신이 자연의 일부가 된 것처럼 이곳저곳을 살피며 천천히 자연의 흐름처럼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시골길을 걷는다면 오산이다. 시골길을 걸으며 낭만을 즐긴다는 생각이 너무도 잘못한 생각임을 조금만 걷다 보면 알게 된다.
아주 좁은 차가 들어올 수 없는 길을 빼고는 모든 길들을 차들이 점령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시골길일수록 무슨 심사인지 '접도구역'이라고 해서 사람이 마음 놓고 걸을 길을 마련해 놓고 있지 않다.
걷는 통한 씽씽 쌩쌩 달리는 차들에 움찔움찔 놀리기 일쑤인데... 한적한 시골길마저 이럴진대, 도심의 길들은 어떤가.
도심의 길들은 사람을 위한 길이 아니다. 차들을 위한 길이다. 심지어는 사람이 걸어다니라고 구획해 놓은 보도까지 차들이 침범해 마치 자기 자리인양 떡허니 서 있다. 보도변 주차장이다. 이것만이 아니다. 주차장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보도를 침범해야만 한다. (이 책, [서울 강남의 보도. 사람은 남고 자동차는 가라]는 장에 잘 나와 있다)
이래저래 보행자들이 마음 놓고 걸을 수 있는 도로가 없다. 여기에 더하여 사람을 위해 만들어 놓았다는 광장을 생각해 보자. 특히 서울 중심가에 있는 광화문 광장.
그 광장의 좌우로 차들이 달리고 있다. 광장에는 차들이 들어오지 못하지만 광장에 가기 위해서는 차들을 통과해야 하고, 기껏 통과해서 광장에 도착했다고 해도 보이는 것은 좌우의 차들이다. 물론 앞쪽으로 광화문이 보이고, 그 차들의 홍수 속에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이 버티고 있기는 하지만, 그건 위안이 되지 않는다.
차들이 뿜어내는 매연 속에서 사람들은 광장이랍시고 광화문 광장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사람을 위한 도로는 없다. 아니, 도로라는 말 자체에 이미 차들을 위한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오로지 통과하기 위해 존재하는 공간, 그것은 도로다. 우리가 생각하는 길과는 다르다. 길은 목적지에 가기 위한 통과지점이라는 의미보다는 그 과정이 바로 목적이 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길은 사람을 위한 장소다. 이 곳에서 사람들은 서로 관계를 만들어 간다.
이 길을 거리로 바꾼다. 이 책은 이런 길, 거리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우리의 거리는 과연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 여러 도시의 거리들을 살피면서 얼마나 사람 중심에서 벗어나 있는지를 때론 한탄하면서 때론 분개하면서 보여주고 있다.
(단지 차도와 보도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 거리를 중심으로 들어서 있는 건물들, 그리고 그 건물들의 이름표라고 할 수 있는 간판들 모두를 다루고 있다)
거리가 살아 있으려면 사람들이 걸어다녀야 한다. 그것도 마음 놓고. 이것저것을 보며 이곳저곳을 들를 수 있으며,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고 때론 걸으며 때론 앉아서 쉬며 관계를 만들어 가는 곳, 그곳이 바로 거리가 되어야 한다.
이런 거리가 많을수록 우리들은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우리나라의 거리들은 이미 차들에게 점령당했다. 사람이 아닌 차가 주인공이다. 그리고 차들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은 거리는 머무는 곳도, 과정을 수행하는 곳도 아닌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지나쳐야만 하는 공간으로 변해 버렸다. (차만이 아니라 거대한 건물,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건물들에게도 점령당했다. 사람들을 너무도 왜소하게 만들어버리는 몰개성적인 그 건물들...)
이런 변화가 과연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가? 아니라고 한다. 우리의 행복은 거리를 사람들이 돌려받을 때 돌아올 수 있다.
이 책이 나온 때가 1999년이니 이미 한참 지난 때의 일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지만 이 책이 나오고 근 20년이 되어가는데도 이 책에서 비판한 내용들이 아직도 우리에게 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거리는 아직도 우리 사람보다는 자동차들이 주인공으로 살아가고 있다. 많은 도시에서 차 없는 거리를 시행하고 있지만 이는 한시적이다. 주인공들에게 조연들도, 엑스트라들도 좀 배려하라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 (본말전도다. 주인공은 분명 사람이어야 한다. 거리의 주인공은 사람, 조연과 엑스트라는 차들과 건물이 차지해야 한다)
이 점이 안타깝다. 아마 저자도 이 점을 가장 안타깝게 여기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손 놓고 누군가 해주기만 해서는 안된다. 저자도 말한다. 거리를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지내게 하는 장소가 되게 하는 일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사람들이 해야 한다고...
이 책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이 많았다. 좋은 말이고 옳은 말이라고... 더 시민의식이 깨어난 지금 시대에 우리는 이 책의 저자가 말한 것처럼 거리를 우리 사람들에게로 돌아오게 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한 책이기도 한다.
많이 좋아지고 있으니, 이 책에서 한 주장을 받아들이고 사람 중심의 도시, 사람 중심의 장소를 만들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는 긍정적인 면을 생각하면서, 내가 살고 있는 곳의 거리, 아니 내가 살고 있는 곳을 생각하게 한 책이다.
덧글
이 책을 검색해보면 절판이라고 나온다.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이 책에서 말한 것들이 과거의 일로 되어버린 것들도 많다. 그렇다면 절판이 타당할 수도 있다. 다만, 이 책에서 말한 것들이 지금 어떻게 변했는지 개정판이 나왔으면 좋겠다. 이 때 개정판은 절판된 이 내용을 그대로 싣되, 변한 것을 그 내용 다음에 실어서 비교할 수 있게 해주면 좋겠다. 이건 순전히 내 바람이다.
가령 청계천 같은 경우, 이 책이 나올 당시는 복개가 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복개가 되어 있다. 이 변화를 건축가의 눈으로 다시 설명해 주는 것도 좋을 듯하니, 이런 식으로 세월을 반영한 변화를 이 책도 반영해서 다시금 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