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 그로인해 남자들은 노동하는 고통을, 여자들은 출산하는 고통을 느끼개 되었다는데...
그런데 아담이 쫓겨나지 않았으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과연 우리는 이 세상을 알고 지냈을까?
아무런 의식없이 창조주의 뜻대로 사는 기계와 다를 바 없지 않았을까? 스스로 생각하고, 자신의 삶을 책임질 수 있게 된 것, 그것이 아담의 추방으로 우리 인류가 얻게 된 것 아닌가.
그렇다면 아담은 쫓겨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나온 것일 수도 있다. 아담은 창조주가 시키는 대로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려는 몸짓을 보인 것일 수도 있다.
그 자리에 있었으면,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그는 행복이라는 말조차 모르고 지냈을 거고, 그러니 자연스레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존재인지에 대해서도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그렇게 살아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아담은 우리에게 삶을 가져다 준 존재라고 할 수 있는데... 조원규의 시집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읽게 되었는데...
다른 시들은 그닥 마음에 와 닿지는 않았는데, 이 시는 무언가 마음에 울림을 주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 존재 아니던가. 이렇게 우리는 아담의 다른 얼굴을 지니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시집 제목이 된 이 시 '아담, 다른 얼굴'을 보자.
아담, 다른 얼굴
기억하면 아직도
낙원에서 쫓겨나던 저녁,
그러나 과연
추방이나 시선 없는 삶 따위가
나를 떨게 하였으랴
그보다는 등지는 몸짓,
나의 비굴함이 오래도록
고통보다 깊은 시름이었으니
한 저녁에 누워 꿈꾸면
기쁨 없이도 미소하며
나는 끄덕이며
다시 한번 낙원을 떠나려는 자,
말없이 몸을 일으켜
저편을 바라보는 자이다
조원규, 아담, 다른 얼굴, 민음사, 2001년 1판. 36쪽.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도 현실에 그냥 머물러서는 안된다. 내가 있는 곳에서 다른 곳을 보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저편을 바라보는 자' 그런 사람이 바로 우리 인간 아니던가.
나 역시 저편을 볼 수 있어야겠다. 지금이 만족스러워도 저편을 보아야 하는데, 만족스럽지 않은 지금은 당연히 '비굴함'에 부끄러워만 하지 말고 저편을 바라보고 '몸을 일으켜' 가야겠다.
이 시, 그런 점에서 나를 돌아보게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