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 - 기념시선집 창비시선 300
박형준 외 엮음 / 창비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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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문단권력이라고 일컬어지는, 예전에는 우리나라 문학을 이끌어왔던 창비에서 낸 시집들 201번부터 299번까지에서 시 한 편씩을 골라 엮은 시집이다.

 

100권의 시집이 나오려면 몇 년이 걸리나 했더니, 거의 10년이 걸렸다. 1년에 10권 정도 나온 셈인데, 여기에 겹치는 시인이 있으니,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모두 100편이 아니라, 86편이다.

 

창비에서 총 86명의 시인이 백 권의 시집을 냈다는 말인데, 한 시집에서 한 편의 시들을 골라 그 자체로도 기념할 만하다. 그럼에도 겹치는 시인들을 빼고 86편만 엄선한 데는 편집자 나름대로의 고민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엮은이의 말에 의하면 이 기념시집은 '사람'을 주제로 삼았다고 한다. 어려운 시대를 거쳐서 민중들을 이끄는 등불 역할을 했던 시들이 초기 창비시들이라면 이제 민주화를 어느 정도 이룬 시대에서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말도 있듯이, 우리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우리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시대를 지내오면서 사람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시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위로해주는 시, 사람을 만나게 해주는 시,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 주는 시, 그런 시들이 이 시집에 실려 있다고 보면 된다.

 

한 편 한 편 읽으면서 사람을 생각하고, 자신을 생각하고, 또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을 생각할 수 있도록 해주는 시집이라고 할 수 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이 시집에서 만날 수 있는데... 많은 시들 중에서 내 눈에 확 들어온 시.

 

장석남의 '수묵 정원1'이라는 시다.

 

수묵(水墨)정원1

         - 강(江)

 

먼 길을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강가에 이르렀다

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

버드나무 곁에서 살았다

겨울이 되자 물이 얼었다

언 물을 건너갔다

다 건너자 물이 녹았다

되돌아보니 찬란한 햇빛 속에

두고 온 것이 있었다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다

다시 버드나무 곁에서 살았다

 

아이가 벌써 둘이라고 했다

 

박형준, 이장욱 엮음, 걸었던 자리마다 별이 빛나다, 창비, 2009년 초판 3쇄. 12쪽.

 

 

찬란한 세상을 꿈꾸며 앞으로 나아가길 꿈꾸던 젊은 시절, 그러나 눈 앞에 나타난 강. 결국 그 강을 건널 수 있을 때는 강이 얼었을 때. 간신히 건넜다고 생각하는 순간, 놓고 온 것, 두고 온 것. 나를 더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 못하는 것.

 

그 자리에 머물러, 강가에 머물러 살 수밖에 없는 삶. 그런 삶을 살아오지 않았나? 나이를 먹어가면서 더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붙박여 살아오지 않았나.

 

이 시를 읽으며 나는 강에서 얼마나 멀어졌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나 역시 버드나무 곁에서 한 발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구나. 그래 어느덧 나도 아이가 둘이구나. 이렇게 살아왔구나, 살아졌구나 하는 생각.

 

다시 앞을 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한 시다.

 

이렇게 이 시는 나를 다시 돌아보게 해주었다. 나 역시 이 자리에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과 연결해주는 시. 그런 시. 이 시집은 '사람'을 '사람' 곁으로, '사람'을 '사람'과 연결해주는, 나를 다시 '사람'으로, 삶을 사는 '사람'으로 불러내 주는 역할을 한다.

 

이 시집에 있는 어느 시든 펼쳐 읽으면 '사람'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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