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그만큼 정신이 분산되어 가고 있단 말이다.

 

도대체 어느 하나에 집중할 수가 없다.

 

아무리 스펙터클한 사회라지만, 이건 좀 심하다.

 

다양성, 창조성을 말하는 나라에서 교과서만은, 그것도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는 -굳이 E.H.카의 말을 빌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란 말을 하지 않더라도- 역사를 단 하나의 교과서로 만들겠다는 발상을 하는 나라.

 

이건 좀 아니다 싶다. 그런 역사교과서의 국정화를 반대하는 교사들을 징계하겠다는 교육부.

 

교육부의 역할이 이런 것인가? 교사들과 경쟁을 하겠다는 건가? 아니, 경쟁이 아니라 교사들을 생각하면 안 되는, 또 행동해서도 안 되는 기계들로 만드는 부서였던가?

 

이런 생각이 든 게 '악스트 2권'(본래는 'Axt'라고 써야하지만, 난 아무래로 한글이 편하다. 우리나라 소설을 위한 잡지라면서 표지가 영어인 것이 별로 맘에 안 든다. 그런데... 예술과 텍스트를 합쳐 독일어로 '도끼'를 만든 그들의 의도도 존중하긴 해야 할 것이다. 책 제목을 '도끼'라고 하면 집어들지 않을 독자가 더 많을테니 말이다)에 나온 박민규의 인터뷰를 읽으면서이다.

 

이 책을 구입하게 된 계기도 바로 박민규에 대한 대담이 실렸기 때문이기도 한데...

 

박민규는 이 대담에서 악스트란 잡지가 경쟁하지 않는 잡지였으면 한다고 한다. 그 말은 악스트가 늘 새로움을 추구하면 된다는 말이다.

 

새로운 것은 새롭기에 경쟁할 것이 없으니 말이다.

 

이 말 참 무섭다. 이게 바로 창조요, 다양성 아닌가. 그냥 새로운 자신의 길을 가기에 다른 사람들 신경쓸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역사교과서에 적용해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역사적 관점에 자신이 있으면 그냥 자신의 교과서를 만들면 된다.

 

채택은 현장의 교사들이 한다. 굳이 하나로 통일할 필요가 없다.

 

하나로 통일한다는 얘기는 새로움이 없다는 얘기다. 그냥 있는 것을 밀어붙이겠다는 말이고, 그래서 경쟁을 하겠단 얘기다.

 

경쟁을 하고 싶은데, 경쟁력이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 경쟁 상대를 경쟁의 무대에 오르지 못하게 하면 된다.

 

나만 무대에 올라 부전승을 거두면 된다.

 

싸울 필요가 없다. 상대를 못 올라오게 할 방법이 있으니까. 이런 상태에서 굳이 새로워질 필요가 있나?

 

소설만치도 못한 생각이다. 발상이다.

 

다시, 우리 사회는 다양성, 창조성이 필요한 사회다. 아니, 이 시대가 그런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나오고, 그 의견들이 부딪쳐야 한다. 그런 부딪침 속에서 새로움이 나온다.

 

새로움이 우리 사회를 더욱 풍요롭게 한다.

 

악스트 2권, 박민규의 대담, 자세히 읽을 필요가 있다. 이 책은 이 대담 하나로도 가치가 있다.

 

그냥 소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 사회에 대한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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