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구정동'하면 우선 화려함이 떠오른다. 강남 개발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고, 이 압구정동은 갈매기와 벗하는 동네가 아니라, 자본과 벗하는, 화려한 소비의 천국인 동네가 되었다.
하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하면 부자들의 상징이었고(한때는 그랬단 말이다. 요즘은 타워팰리스-이게 도곡동이던가-로 넘어간 경향이 있지만), 그곳에 있는 현대백화점은 강남개발의 상징이었다.
한 때 '야타족'이, '오렌지족'이 넘실대는 곳이었던 압구정동.
유하는 이러한 압구정동에 대한 감각을 시로 살려놓고 있다. 소비지상주의의 모습.
여기에는 생활의 지난함은 감춰지고 오로지 눈에 띄는 화사함만이 넘쳐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옭아매는 올가미에 불과할테니...
우리가 소비자본주의에 빠지면 빠질수록 빠져나올 수 없는 함정으로 점점 더 깊게 들어가게 되는데... 그것을 알까?
당장 눈 앞의 즐거움을 위해서 우리는 온몸을 내던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시 하나 보자.
이 시집에서 첫번째로 나오는 시다.
오징어
- 여는 시
눈앞의 저 빛!
찬란한 저 빛!
그러나
저건 죽음이다
의심하라
모오든 광명을!
유하,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문학과지성사. 2010년 재판 14쇄.11쪽.
빛은 소비다. 소비를 부추기는 현실 앞에서 소비를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가는 우리 인간의 모습. 그러나 그 결과는?
소비를 부추기는 사회에서, 소비를 하지 못하면 뒤떨어진 사람이 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함께 휩쓸려 가지만, 그 결과는 걷잡을 수 없다.
이처럼 너무도 당연한 것이라 여기는 것들이 당연하지 않을 수 있음을, 이 시집을 통해 생각해 보게 되는데...
시집에 공간이 두 곳이 나온다. 한 곳은 '하나대'이고 한 곳은 '압구정동'이다.
'하나대'는 시인의 고향, 아니 시적 화자의 고향이고, 압구정동은 지금 현재 그가 있는 곳이라고 보면 된다. 대조되는 곳. 한 곳은 퇴락해 가고, 한 곳은 흥성거리고 있는 상태.
우리들의 삶도 그렇지 않은가. 하나가 성하면 하나는 쇠할 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만을 좇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어떤 곳인지,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아무 생각없이 체제 속에서 그냥 그렇게...
또 하나의 시. 앞에서 인용한 시와 연결된다. 우리를 그렇게 앞으로, 앞으로 소비만 하게 몰아가는 이 체제에 대해서 우리는 과연 인식하고 있을까를 생각하게 하는 시.
체제에 관하여
횟집 수족관 속 우글거리는 산낙지
푸른 바다 누비던 완강한 접착력의 빨판도
유리벽의 두리뭉실함에 부딪혀
전투력을 잊은 채 퍼질러앉은 지 오래
가쁜 호흡의 나날을 흐물흐물 살아가는 산낙지
주인은 부지런히 고무 호스로 뽀글뽀글
하루분의 산소를 불어넣어준다
산낙지를 찾는 손님들이 들이닥칠 때
여기 쌩쌩한 놈들이 있는뎁쇼
히히 제발 그때까지만 살아 있어달라고
살아 있어달라고
그러나, 헉헉대는 그대들의 숨통 속으로
단비처럼 달콤히 스며드는 저 산소 방울들은
진정 생명을 구원하는 손길인가
투명한 수족관을 바라보며 나는
투명하게 깨닫는다
산소라고 다 산소는 아니구나
저 수족관이라는 틀의 공간 속에서는
생명의 산소도
아우슈비츠의 독가스보다
더 잔인하고 음흉한 의미로
뽀글거리고 있는 것 아니냐
유하,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문학과지성사. 2010년 재판 14쇄. 51-52쪽.
우리가 소비를 통하여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를 유혹하는 저 화려한 불빛들은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가는가. 소비사회라는 우리 사회의 체제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맹목적으로 빛을 향해 달려드는 오징어처럼 되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적어도 이성을 지닌 인간이라면. 그래서 우리는 이제 '압구정동'을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그 체제 속으로 자발적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 자발적으로 나올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 이제 이 시집의 제목을 바꾸자. 시집에서 '압구정동'과 짝을 이루고 있는 장소로.
"바람부는 날이면 하나대에 가야 한다"
하나대란 우리가 잃어버린 고향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본질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본질, 우리의 고향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