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에 시를 읽으며 기분이 좀 상쾌해지기를 바랐는데...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 제목이 참 청신하다. 시원한 느낌을 주는 제목이어서 헌책방에서 망설이지 않고 구입한 시집인데...
첫장을 넘기면서부터 '어라ㅡ 이게 아니네.'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체적으로 시가 무겁다. 무거워서 축 처진다.
그야말로 잎사귀가 공중에서 하늘거리지 못하고, 물 속으로 침잠해 들어간다.
물 속에 들어간 잎사귀, 숨을 쉴 수 있으려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삶을 떠난, 그런 모슴만 연상되는 시들이 그득하다. 이런,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고, 마음에 한 자락 시원한 바람을 맞으려고 시집을 펼쳤더니만, 이렇게 우울하다니... 습한 바람이, 무덥고 습한, 땀이 온몸에서 스멀스멀 배어나오게 만드는 그런 바람이 온몸을 관통하다니...
아무리 동종요법이 좋다고 하지만, 이렇게 우울한 시대에 이런 우울한 시, 죽음을 노래하는 시들이 도처에 있는, 죽음을 앞둔, 이미 생을 모두 소진한 삶들이 널려 있는 이런 시들을 읽는 마음이 유쾌할 리는 없다.
유쾌하지 않더라도 이상하게 마음에 남아 있는데... 그래도 이 시집에서 참신한 표현을 발견했는데...그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하나?
'새가 쪼아먹은 감은 신발 / 바람이 신어보고 / 달빛이 신어보고'('빈집' 1연의 5-7행. 12쪽)란 표현.
어떤 물체에 난 구멍을 신발이라고 한다. 바람도 달빛도 신는 신발, 그러면 빈집도 결국 신발이다. 누구나 신을 수 있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면 우리들의 삶도 신발이다. 나라는 몸을 이끌고 온 신발.
신발은 언제든지 벗을 수 있고, 또 언제든 벗어야만 하는 존재. 그러면 우리네 삶도 신발과 같다면 언젠가는 벗어야 하는데... 어떻게 벗을까? 언제 벗을까? 이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마치, 선(禪)을 공부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는데...
많은 시 중에 함께 생각해 볼 만한 시라는 생각이 든다. 이 시는. 어차피 우리도 늙어가고, 또한 늙으신 부모임이 계실테니... 그런 가족들을, 삶을 생각하며 읽을 만한 시다.
방바닥에 떨어진 머리칼
어머니는 팔순을 내다보면서부터
손바닥으로 방을 닦는다.
책상 밑에서부터 시작하여
어둠침침한 침대 밑에 한쪽 손을 쭉 뻗어넣고
엎드린 채로 머리칼을 쓸어내오신다.
어머니의 머리칼은 하얗고
내 머리칼은 짧다.
그러나 정체불명의 것도 있다.
빗자루로 아무리 쓸어내도 방바닥에는
어머니와 내 것이 아닌
흔적이 떨어져 있다.
어머니는 먼지가 가득 묻은 머리칼 한움큼을 뭉친다.
그걸 보고 있으면,
어머니의 지문이 다 닳아져
우리 둘 외의 다른 머리칼로 변한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한달에 한번 다녀가실 때마다
못난 자식을 두고 가는 슬픔이
방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여, 버스정류장 앞에서 나는 그녀를 보낼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으로 보는 게 아닐까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을 쓸어보게 된다.
박형준,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 창작과비평사, 2003년 초판 4쇄. 48-49쪽.
어머니와 자식의 사랑이 이렇게 애잔하게 표현될 수도 있다니... 머리칼이 하나둘 떨어져 나갈 때부터 이제는 죽음과 점점 더 가까워지는 나이가 된다.
여기에 어머니의 것도 자신의 것도 아닌 머리칼은 삶의 고단함, 삶을 소진한 결과들일 것이다. 그러니 시의 화자가 자신의 머리칼을 쓸어보게 될 수밖에.
나 역시 내 머리칼을 쓸어보며, 부모님을 생각한다. 나보다도 더 숱이 없어진 부모님. 그 분들과 나의 삶이 함께 해 온 나날들.
무더운 여름, 이제는 내가 대접해야 할 때. 식사라도 함께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