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미시령 창비시선 260
고형렬 지음 / 창비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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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구입한 시집이다.

 

'밤 미시령"

 

미시령 하면 눈이 생각나고 추위가 생각나고 교통통제가 생각나는데, 황동규 시던가, '미시령 큰바람'이라고 바람도 있는 그런 고개.

 

고개는 이곳과 저곳을 가르기도 하지만, 이곳과 저곳을 연결해주기도 하고, 이곳과 저곳 모두를 볼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미시령이라는 이름 자체가 주는 위압감도 대단한데, 여기에 '밤'이라는 말이 붙었다. 밤의 미시령이라, 무언가 캄캄하고, 앞으로 나아가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래 무슨 시일까? 궁금증이 인다. 읽어봐야지... 하고 시집을 펼쳐 읽는데... 위압감보다는 뭔지 모를 슬픔이 밀려들어온다.

 

  밤 미시령

 

저만큼 11시 불빛이 저만큼

보이는 용대리 굽은 길가에 차를 세워

도어를 열고 나와 서서 달을 보다가

물소리 듣는다

다시 차를 타고 이 밤 딸그락,

100원짜리 동전을 넣고 전화를 걸듯

시동을 걸고

천천히 미시령으로 향하는

밤 11시 내 몸의 불빛 두 줄기, 휘어지며

모든 차들 앞서 가게 하고

미시령에 올라서서

음, 기척을 내보지만

두려워하는 천불동 달처럼 복받친 마음

우리 무슨 특별한 약속은 없었지만

잠드는 속초 불빛을 보니

그는 가고 없구나

시의 행간은 얼마나 성성하게 가야 하는지

생수 한통 다 마시고

허전하단 말도 저 허공에 주지 않을뿐더러

- 그 사람 다시 생각지 않으리

- 그 사람 미워 다시 오지 않으리

 

고형렬, 밤 미시령, 창비, 2009 초판 5쇄. 74-75쪽.

 

꽉 채운 것이 아닌, 비워둠으로써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11시라는 시간도 12시를 향해 가지만, 아직 12시를 넘기지 않은, 마치 고개와 같은 역할을 한다. 저 쪽을 향하지만 발은 이 쪽에 담그고 있는.

 

11시에 미시령에 올라 앞쪽을 바라보면 불빛만 있다. 사람은 없다. 고요한 적막. 그 적막 속에서 자신을 생각한다. 자신의 길을 생각한다. 그리고 비워낸다. 이제는 다시 생각지 않고, 다시 오지 않는다 다짐을 한다.

 

이 쪽 저 쪽 시간과 공간의 경계에 선 사람이 자신을 그 곳에 내어 맡긴 모습... 그냥 그렇게 이 시는 마음 속으로 들어온다.

 

그러다, 시집 전체의 시들 중에서 이상하게 마음에 들어와 박힌 시가 있다. 바로 '4월'

 

      4월

 

죽은 것들이 돌아오느라

죽은 것들이 눈이 멀어 돌아오느라

줄기 부르트고,

꽃으로 애쓰던 잊은 것들 찾아오느라

살아 있던 날을 기억하려고

다른 '나'로 빠져나오려고

허연 죽음의 중심 목질부를 만지려고

물을 찾아 다시 움을 틔워 일어나느라

구름을 모아 문을 열고 달려가느라

접혔던 부분 하염없이 펴느라

가장 빛나는 생명의 꿈을 따르느라

좁을 길을 풀고

기억할 수 없는, 복제할 수 없는

형상을 입느라 자기 하나 옷을 만드느라

천지는 눈 시리게 숨쉬기 바쁜,

안 보이는 이름을 찾아내느라

한줄기 목숨을얻어 끊어진 길 이으려고

길을 대고 처음 생에 닿느라

아 이름 부르며 부스러진 티끌들 모아

안 지치고 기쁘게 찾아오느라

 

고형렬, 밤 미시령, 창비, 2009 초판 5쇄. 80-81쪽.

 

4월이라는 달은 이 시집의 제목 속에 나오는 미시령과 닮았다. 4월은 봄이 시작되었지만, 완전한 봄은 아닌, 그렇다고 겨울도 아닌, 겨울을 딛고 봄으로 나아가는 달이다.

 

생명들이 약동하고, 눈부신 5월을 향해 가는 4월. 이 4월은 생명의 꽃을 피우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

 

시에서 말하는 많은 생명들이 우리나라 역사에서 사람들로 살아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 시를 읽으며.

 

우리들의 역사에서 우리들도 꽃을 피우기 위해 그렇게 힘들게 지내왔는데... 꽃피는 5월이 왔는지... 아직 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힘들게 우리를 고개까지 올려준 4월에 미안해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런 생각을 하게 한 시.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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