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가 산적해 있다.
문제가 많다는 것을 사람들은 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는 것만 알지,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는 않는다. 그냥 문제는 문제로 남겨두고 있을 뿐이다.
청년실업이 문제가 되니, 중동에 투자를 해서 중동으로 청년들이 나가도록 해야 한다는 농담, 농담이겠지, 진담은 아닐 거다.
이 나라 청년들을 독일로 수출했던 때가 있었는데, 이 나라 처녀들을 독일로 수출하던 때가 있었는데, 그 때는 후진국이라고, 막 개발을 시작한 개발도상국이라고 했었는데, 지금, OECD에 가입되어 있고, 나름대로 선진국으로 향해가고 있다는 때에 중동으로 다시 청년들을 내보내야 하다니.
그 말이 진담이었겠어. 농담이었겠지. 청년 실업을 걱정한.
노인들은 생활이 어려워 생계를 걱정해야 하고, 병을 걱정해야 해서 노인 자살율이 높고, 중년들은 언제 비정규직이 될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으며, 자식들의 교육비 걱정에 등골이 빠지고 있는데...
학생들은 입시에 찌들어 오로지 성적, 성적만을 외치고, 진짜 공부가 무엇인지, 배움이 무엇인지, 도대체 왜 인생은 살만한 것인지 고민할 생각도 없이 교과서, 참고서만 파고 있는 형편인데...
그런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듯이 정치권은 보궐선거에만 매달리고 있다. 마치 보궐선거에서 제 당 사람들이 많이 당선되면 우리나라가 좋아지기라도 하다는 듯이.
정말 아무 일이 없을까? 세상이 병들었는데, 아픈 사람이 없을까? 아니, 사람들이 모두 아픈데, 세상이 병들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애꾸 세상에 두 눈박이가 비정상이듯이, 우리는 모두 아프기 때문에 아프지 않은 상태를 비정상으로 파악하고, 우리처럼 아픈 상태가 정상인 듯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은 세월호, 재판에 이겼음에도 복직이 되지 않는 노동자들... 개발에 휩쓸려 살아가는 터전을 잃은 사람들... 사람들...
이성복의 시집을 읽다가, 특히 '그날'이라는 시를 읽다가, 이 시에서 말하는 '그날'이 '오늘'이 아니었으면 했는데... 왜 자꾸, '그날'이 '오늘'이라는 생각이 드는지...
이성복의 이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는 소리의 울림보다는 시각 효과를 드러낸 시들이 많고, 또 유곽 등과 같은 변두리 이야기가 많다. 그래서 시들이 길어지는지 모르지만... 이제는, '그날'을 벗어나야겠다.
적어도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그 날
그날 아버지는 일곱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 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 점(占) 치는 노인과 변통(便桶)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성복,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사, 1989 13쇄. 6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