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자의 기억
미셸 라공 지음, 이재형 옮김 / 책세상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패자들은 역사의 휴지통에 들어간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알프레드 바르텔르미가 트로츠키의 말을 빌려 쓰는 말이다. 패자들은 역사의 휴지통으로 사라져 버린다는 말. 이 말은 결국 역사란 승자들의 기억이라는 말이고, 패자들의 기억은 사라져 버린다는 말이다.

 

이 말을 쓴 트로츠키 자신도 역사의 휴지통 속으로 들어갔지만, 정작 그보다도 먼저 역사의 휴지통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아나키스트들이었을 것이다.

 

하여 이 소설은 이러한 아나키스트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도 세계 역사에서 가장 격동기라고 할 수 있는 191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를 중심으로 다룬. 알프레드를 중심으로 우리가 아는 인물이 많이 나오는.

 

그러나 결국 역사의 휴지통으로 사라져 버린 또는 버릴 뻔한 사람들의 이야기.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패자들에 대한 기억을 김성동이 되살려 내고 있다. 그가 쓴 "현대사 아리랑"이라든지, "염불처럼 서러워서"를 보면 패자들을 역사의 휴지통에서 꺼내어 복원시키려 애쓰는 그의 노력이 잘 드러난다.

 

이 소설의 제목이 "패자의 기억"인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승자로만 점철된 역사에서 그 때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의 역사를 복원시켜 내는 일 역시 중요하다는 것. 또 역사는 승자와 패자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헌책방과 휴지통

 

공통점을 찾자. 이 소설은 이 두 단어에서 시작한다. 시작이 바로 헌책방에서의 만남이고, 헌책방에서의 만남은 트로츠키가 했다는 말인 역사의 휴지통과 연결이 된다.

 

헌책방이 어떤 곳인가? 한 때 누군가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책들이 이제는 소용이 없다는 판정을 받고 새로운 주인을 찾아 버려진 곳 아니던가. 여기서도 주인을 찾지 못하면 먼지만 뒤집어 쓴 채 세월을 보내다 결국 완전히 잊혀지고 폐기처분 되는 곳.

 

그곳이 바로 헌책방 아니던가.

 

그러나 이러한 헌책방에서 새로운 주인을 만난 책들은 자신의 기록을 기억으로 남기게 된다. 이들은 다시 세상에 나와 활동을 하게 된다. 자신의 쓸모를 찾게 된다.

 

역사의 휴지통도 마찬가지다. 역사의 휴지통이라는 말이 잘 다가오지 않는다면 컴퓨터의 휴지통을 생각하면 된다.

 

지금은 필요없다고 생각해서 휴지통으로 버린 파일들. 그 파일들이 어느 순간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복원시키는 기능을 통해 다시 제자리로 돌려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헌책방으로 부터, 세월이 흘러흘러 결국 헌책방 주인이 된 알프레드를 젊은 내가 만나는 것으로부터, 그리고 그에 대해 알아가면서 그의 전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몇 십년의 세월이 흐른 뒤 그의 이야기를 한 편의 글로 쓰는 과정과 그의 삶에 내용이 이 책에 드러나는 것이다.

 

헌책방에서 옛 아나키스트를 만나고, 그의 삶을 재조명하고, 그의 사상이 버려진 것이 아니라 복원되어야 함을, 따라서 그의 첫책을 그가 다시 펴내려고 하는 것과 그들의 사상이 다시 세상에 나와야 함을 헌책방과 휴지통을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역사와 역사소설

 

이 소설은 역사소설이라고 해야 하니, 역사와는 다르다. 그러니 이 소설에 나온 내용이 다 사실이야 하면 안된다. 특정한 인물들이 역사적인 인물이고, 큰틀에서 그 인물들이 겪었던 일들은 사실이나, 구체적인 내용에서는 허구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간혹 역사소설을 읽다가 역사와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소설은 우리에게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을 키워주고, 또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 경험을 하게 해준다. 그것이 역사소설의 매력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읽을 필요가 있다.

 

아나키즘에 대하여

 

이 소설은 한때는 주도적인 사회사상이었으나 마르크시즘과 다른 사상들에 밀려 우리 기억에서 사라졌던 아나키즘에 대해서 알려준다. 때마침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역사의 휴지통에서 아나키즘이 복원되어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물론 아직은 지식인들의- 이 소설에서 그렇게 경계해 마지 않는 - 사상에 머무르는 경향이 있지만,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아나키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으니... 아나키즘에 다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아나키즘이 어떤 사상이고, 어떻게 활동했으며 그들의 주요사상은 무엇이고, 주요 사상가는 무엇인지 이 책은 역사소설의 형식을 통해서 알려주고 있다. 역사소설이기에 그것도 프랑스 사람을 주요 인물로 삼고 있기에 크로포트킨이나 바쿠닌, 생시몽, 푸리에 등의 사상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들에 대해서도 오히려 더욱 생생하게 알 수가 있다.

 

이것이 바로 소설의 매력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소설을 통하여 역사의 휴지통과 헌책방은 연결이 되고, 우리에게는 이미 사라져버렸다고 생각되었던 과거들을 끄집어내 상기시켜 주고, 그 과거가 지금의 우리와 연결되고 있음을, 지금에도 유용함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방대한 분량의 소설

 

이 소설 분량이 참으로 방대하다. 무려 700쪽이 넘는다. 그것도 한 권으로 펴냈으니, 우선 분량에 망설여진다.

 

두 권으로 분책을 했더라면 좀더 좋았으려나. 하지만 조금이라도 현대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특히 사회주의 운동사나 아나키즘 운동사, 또는 에스페란토어 운동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 소설, 결코 길지 않다.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읽어야 한다. 한 노동자 출신의 아나키스트가 서구 사회에서 겪게 되는 격동의 30년 정도가 너무도 흥미진진하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아나키스트들이 어떻게 탄압을 받고 사라져갔는지를 러시아 혁명에서, 또 스페인 내전에서 겪는 일들에 대한 서술을 통해 실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작품을 통해서 우리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된다. 문학의 힘이 바로 우리 삶을 이끄는 힘이라고 한다면, 이 소설은 어떤 삶을 추구해야 하는지, 도대체 정치는 무엇인지, 국가는 무엇인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작년에 읽었던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이라는 만화가 마음을 울렸는데, 그와도 연결이 되고, 또 "어느 무정부주의작의 죽음'이라는 책과도 연결이 된다.

 

이 두 책은 모두 스페인 내전에서 아나키스트들의 활동에 대해서 쓴 글이기에 이 책의 중후반부와 연결이 된다. 특히 '두루티'라는 인물은 공통적으로 등장을 하니 이 책들을 먼저 본 사람은 이 소설이 반갑게 다가올 것이다.

 

양차 세계대전에 대한 아나키스트들의 입장, 국가에 대한 아나키스트들의 입장, 정치활동에 대한 입장 등 어쩌면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서 광범위하게, 그러나 너무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아나키즘 논쟁과도 연결이 되고,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는, 그리고 지금 이 시대에 정치운동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다시 부상하고 있는 아나키즘 운동에도 시사점을 줄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알프레드 바르텔르미'

 

이 책의 주인공인 아나키스트. 그가 겪은 현대사의 격랑이 아프게 다가온다. 그는 비록 패자에 속하지만, 그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휴지통에서 다시 복원되어 우리들 기억에 남는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지만 간혹 이런 소설들을 통해서, 또 다른 기록들을 통해서 역사에 복원되어 기억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런 경우가 바로 우리 역사를 더욱 풍부하게 하고 바른 길로 갈 수 있게 한다.

 

비록 소설이지만 많은 경우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는 역사소설이므로 이 소설을 읽으면서 20세초 세계 역사의 격동기에, 또 서양역사에서는 백가쟁명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그 사상 난무의 시대를 온 마음으로 느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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