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을 보면 가끔 하얄 때가 있다. 공기는 투명해서 눈에 보이지 않아야 하는데, 마치 어린 시절 그림을 그릴 때 여백을 그냥 놓아두지 않고 꼭 흰색으로 칠한 듯, 하얗다.
그 하얌이 그냥 안개이면 좋으련만, 요즈음 연무라고 하고, 스모그라고도 하고, 그보다 더한 미세먼지가 기준치보다 높아도 너무 높은 상태라고도 한다. 그냥 안개가 아닌 셈이다.
백의민족이라고 하얀 색을 그리도 좋아하던 우리 민족이지만 이렇게 공기마저 하얗게 된 것은 좋지 않다. 무엇보다 이 하얌이 앞을 가린다. 보이지 않게 한다. 그래서 '안개 정국'이라는 말이 나왔는지도 모르고, 예전에는 '오리무중'이라고도 했으니...
가끔 끼는 안개는 그래도 낭만이 있다. 그러나 너무도 자주 목격되는 안개를 빙자한 연무들은 우리를 힘들게 한다.
이런 안개와 비슷한 상태, 무언가 질척거리고 겉으로는 깨끗한 것 같지만 우리 몸에는 안 좋고, 보여야 할 것 같은데 투명하지 않아 도저히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상태.
지금 우리나라가 처한 모습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 세상이 이렇게 안개로 뒤덮여 있는 세상 아니던가.
기형도의 시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의 시를 읽으면 너무도 우울해지기 때문이다. 그의 시에서는 앞이 보이지 않는다. 그냥 헤매고 있을 뿐이다. 안개 속을 더듬으며 헤매고 있는 상태. 그것이 그의 시에서 느껴지는 마음이었기에 맑은 상태에서 기형도의 시를 좋아하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요즘 그의 시가 자꾸 생각났다. 다시 한 번 읽어봐야지. 그렇게 해서 읽기 시작한 기형도의 유일한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첫장을 펼치자마자, 이런, 이런,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 세상의 모습이구나. 기형도가 간 지 25년 정도 되었는데(그는 1989년에 세상을 떴다), 어쩜 이리도 지금 현실과 일치할까 하는 감탄이 앞선다.
조금 길지만, 오늘을 이야기하는 것만 같은 그의 시를 보자.
안개
1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처음 와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군단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성역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취객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 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총신을 겨눈다. 상처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을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3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2004년 35쇄. 11-14쪽
이런 안개 세상에서 안개를 일상으로 받아들이면 우리는 우리가 그런 세상의 주식을 갖고 있는 '주주'가 될 뿐이다. 이미 주주가 되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 사실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고통으로 창백해진 모습도 역설적으로 '희고 아름다우며, 무럭무럭'이라고 표현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지만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안개에 싸여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왜냐하면 이것이 그냥 안개가 아니고, 연무라고, 스모그라고, 미세먼지가 너무도 많이 섞여 있는 먼지들의 집합체라고 인식하게 되는 순간 변화가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동안 87년 이후 우리가 경험해왔던 민주화라는 열매가 이미 다 먹어 없어졌다는 사실을, 투명하게 모든 것이 보이던 시절이 갔음을 알게 해준 이 연무는, 기형도 시의 '겨울'과 같다.
우리를 깨닫게 해준. 그의 시를 보자. 마치 '밥과 장미'를 연상시키는 듯한. 모든 것이 황량한 '겨울' 에 우리에게 빛을 주고 온기를 주는 램프와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빵은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가.
그것을 알게 해주는 존재는 바로 '겨울'이고 '안개'다. 기형도의 시에서 오늘 세상을 만났다.
램프와 빵
- 겨울 판화 6
고맙습니다.
겨울은 언제나 저희들을
겸손하게 만들어주십니다.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2004년 35쇄.1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