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고은.

한때 스님 노릇을 했다는 사람.

그러나 내게 고은은 70-80년대를 민족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이었다.

그의 시는 젊은 나에게 얼마나 힘을 주었던가.

 

90년대 시대가 많이 변했고, 2000년대 다시 또 변했다. 민족문학과 민중문학이 아스라히 멀어져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고 민중이 삶이, 민족의 현실이 좋아진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시대의 모습은 이리도 변했으니.

 

어쩌면 고은의 과거 시집을 읽는다는 것이 복고주의에 불과할지도, 자기만족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고은 시집, "내일의 노래" 창작과비평사

 

헌책방에서 구입한 이 책은 1993년도 3쇄판이니 말이다. 거기다 이 시집은 창작과비평사 시집 101번으로 출간이 되었으니, 창비시집이 100호를 넘기고 새로이 시작하는 의미로 펴낸 시집이라는 생악도 든다.

 

제목만 보면 내일을 노래하는 희망을 노래하는, 게다가 시집 번호도 101번이 아니던가. 그런 80년대를 정리하고 이제는 90년대를 잘 맞이하자는 그런 시들이 많아야 할 것 같은데...

 

2015년에 읽어보는 시들에서는 그런 희망을 느끼기가 힘들다. 세상이 그만큼 밝아지지 않았기 때문이고, 우리는 내일로 나아온 것보다 자꾸만 과거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손 놓고,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

 

이 시집에서 두 시를 연결하고 싶어졌다. 자연스레 고사해가고 있는 진보진영과 그럼에도 그들이 살기 위해서 해야만 할 일.

 

       에스페란토어

 

요셉 스탈린은 에스페란토어를 배우는 사람까지

그의 적으로 삼았다 다 죽여버렸다

이런 참극도 모르고

나는 스무살 무렵

전쟁이 지나간 뒤

에스페란토어를 배우다 말고 떠돌았다

 

세계의 언어 가운데

에스페란토어만큼 외로운 것이 어디 있는가

이제 그것은 누가 죽이지 않아도

스스로 죽어가고 있다

 

unu, du, tri, Kvar, Kvir, Ses

하나 둘 셋 세어가며 죽어가고 있다

sep, ok, nau, dek

이렇게 스스로 죽어가고 있다

 

그것을 배우다 만 나도 죽어가고 있다

 

고은, 내일의 노래, 창작과비평사, 1993년 3쇄. 60쪽

(nau라는 글자 u위에 -표가 있는데, 여기서 그런 글자를 찾지 못해서 그냥 u로 표기했다)

 

지금 진보는 그냥 내버려두어도 죽어가고 있다. 한 때 세계공통어라고 했던 평화의 언어인 에스페란토어가 죽어가고 있듯이.

 

그런데 이렇게 진보를 그냥 죽어가게 만들 것인가? 살릴 방도는 있는가? 적어도 이 시집이 "내일의 노래"인데, 이렇게 죽음만을 노래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시인은 '머리 바꿔'란 시를 선보이고 있다.

 

진보가 살려면 이래야 한다. 이렇지 않으면 진보는 그냥 죽어가 사라지고 만다. 명심해야 한다.

 

        머리 바꿔

 

옛날 당나라에 온 역승 구나바드라가

중국어에 능통하기 위하여

꿈속에 나타난 신인에게 청하여

서로 머리를 바꿔

다음날부터 구나바드라는

황하유역 중국어가 잘도 흘러나왔다

무엇을 하고자 하건대

이런 꿈이 있어야 한다

아니 무엇을 하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서로 머리를 바꿀 필요가 있다

네 문수보살의 머리와

내 만황씨 머리와

서로 바꿔

 

고은, 내일의 노래, 창작과비평사, 1993년 3쇄. 106쪽.

 

단지 머리를 바꾸자는 얘길까? 상대방의 처지에 서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는 얘기다. 나만의 고집해서는 전망이 없다는 말이다. 결국 '꿈'이란 '내일'을 살아가는 힘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머리'를 바꾸어서 생각하고 행동할 줄 알아야 한다.

 

벌써 20년도 전에 나온 시집이지만, 이 두 시, 요즘 현실에 딱 들어맞는다.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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