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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훈.가면고 - 작가와 함께 대화로 읽는 소설
최인훈.이태동 지음 / 지식더미 / 2007년 8월
평점 :
구입하기 전까지 많이 망설였던 책이다.
왜냐하면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크리스마스 캐럴/가면고" 책이 이미 있기 때문이다. 이미 읽은 소설이고, 또 내용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책도 집에 있는데 굳이 산 이유는, 바로 최인훈과의 대담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소설가 중에서 단 한 명만 고르라는 무리한 질문이 따른다면 나는 조금 고민은 하겠지만, 거의 주저 없이 최인훈을 선택할 것이다. 최근에 나온 '바다의 편지'를 제외하고는 그의 소설은 다 읽었다고 자부하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그의 "광장"부터 시작하여, "총독의 소리" "태풍" 등등.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그의 전집을 모두 읽고 참 대단한 작가구나 했었는데... 그 때 이 "가면고"도 읽었는데...
그런데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 "가면고"가 그렇게 난해하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는데, 너무도 난해해서 인기가 없는 작품 운운해서, 정말 그런가 하고 다시 읽고, 또 작가의 대담에서도 그런 말을 하나 하는 것을 확인해 보고 싶어서 소장하기로 결심한 책.
나는 난해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작가가 난해하게 썼다고 하고, 평론가들도 난해하다고 하면 내 소설읽기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찾아보니, 그렇지 않다. 이상하게 안심이 된다. 별로 어렵지 않은 소설을 어렵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도 든다.
이태동 : "선생님께서 이 작품을 저와의 '대담 시리즈'를 위한 텍스트로 결정한 이유는 무엇입니까?가장 아끼는 작품이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너무나 난해한 작품으로 생각하시기 때문입니까?"
최인훈 : "같은 주제를 번복한 형식이 주제 전달에 흥미 있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우선 저는 이 작품을 난해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제 의견이긴 하지만 "가면고"는 읽으면 읽을수록 재미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194-195쪽
이거다. 이 소설에 대해 비평가들의 평론을 읽고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소설은 모두가 자신의 이해에 맞게 읽을 수밖에 없고, 어떤 소설도 결국 자기 것으로 재해석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최인훈이 말한 읽으면 읽을수록 재미있는 소설이라는 말은, 읽는 사람에 따라 계속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고,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고, 또 언제 어디서 읽느냐에 따라 같은 사람에게도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말로 받아들이면 된다.
재미있는 소설은 언제 읽어도 새로운 맛이 나는데, 이 "가면고"도 그러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가면고" 한자어로 보면 가면에 대한 고찰인데, 가면은 결국 무엇인가? 우리의 얼굴이다. 그런데 얼굴은 무엇인가? 바로 우리의 정신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우리의 정신에 대한 탐구라고 할 수 있는 소설이다.
뭐 전후세대의 방황, 이런 말들을 신경쓰지 말자. 오직 얼굴, 그리고 우리의 정신에만 집중하자. 우리는 자신만의 얼굴을 지니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자신만의 얼굴은 자신의 내적 영혼이 밖으로 표현되는 형식이다.
정신의 형식이 바로 얼굴인 것이고, 그 얼굴을 남들에게 보이는 것이 바로 가면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얼굴이라고 하지 않고 가면이라고 한 이유는 변화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고정된 것이 아닌, 자신의 행동, 노력에 따라서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뜻에서 가면이라는 말을 썼다고 할 수 있다.
어떤 가면을 쓰느냐에 따라 자신이 달라지는데, 가면을 쓰는 것보다는 가면을 내면에서부터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 더 중요함을 이 소설이 말해주고 있지 않나 싶다.
즉, 자신의 얼굴을 외부에서 찾지 말고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 소설을 읽어도 된다는 얘기다.
외부의 화려함, 언뜻 보면 좋아보임, 겉으로만 꾸밈 등이 아닌, 내부로부터 흘러나오는 내용들이 얼굴이라는 형식 속에 드러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점에서 이 소설 속에서 또 하나의 이야기로 전개되는 다문고(多聞苦) 왕자는 상징적이다. 많이 듣는 고통은 결국 외부로 시선이 향해 있다는 얘기다. 그런 그가 외부의 탈이 아닌 자신의 내적 성찰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제대로 된 얼굴을 갖게 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다.
그럼 현실에서 주인공인 민이 만나는 두 여자를 생각해 보자. 물론 작품에는 세 여자가 등장한다. 가슴 가운데 기미가 있는 여자, 미라, 정임. 첫여자를 제외하고, 그가 깊이 사귄다고 할 수 있는 미라와 정임은 민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미라는 화가이고 정임은 무용수다. 그들은 둘 다 예술을 하는데, 예술은 표현을 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표현을 하는 행위에서도 미술은 매개를 필요로 한다. 즉 몸과 정신 사이에 그림이라는 매개가 개입한다. 직접적으로 표현되지 않고 한 번 굴절되어 나타나게 되니, 이 과정에서 왜곡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이는 정신과 얼굴의 일치를 추구하는 민이에게는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무용은 자신의 몸으로 정신을 표현하는 행위다. 몸으로 표현하는데 중간 매개항이 없다. 오직 자신의 몸으로 드러낼 뿐이다. 그래서 중간에 왜곡될 가능성이 없다.
정신과 얼굴이 일치할 가능성이 많다. 이러니 민이 누구를 선택할지는 이미 이들의 직업에서도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지금 이 소설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이다.
현대는 자신의 내부에 있는 정신을 겹겹으로 가리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중국의 예술인 '변검'처럼 수많은 가면들을 지니고 때에 따라 계속 가면을 바꿔가고 있지 않나?
맨얼굴로 살기 힘든 세상이 되지 않았나? 이런 때 정신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길 원하는 사람은 제정신이 아닌 사람 취급을 받을 수도 있을텐데...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의 얼굴에서 내면의 모습이 나타나기를 기대하고도 있다.
내면과 얼굴이 일치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에 대해서 존경하는 마음을 자연스레 지니게 된다. 지금 우리가 갖지 못한 얼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얼굴은 가면이 아닌, 자신의 행동과 내면에서 우러나와 만들어진 얼굴이기 때문이다.
비록 수많은 가면들을 지니고 사는 현대인들이지만, 이들 역시 본능적으로 영혼이 얼굴을 만든 사람을 알아본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존중한다.
이 소설은 그래서 현대에도 의미가 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우리는 내적 영혼이 얼굴을 만들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바깥에서 오지 않고 오직 자신에게서만 올 수 있음을... 그것이 진정한 사랑임을, 그것이 바로 진정한 사람임을 이 소설을 통해 깨달을 수 있다.
다시 읽어도, 다시 샀어도 후회되지 않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