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곧 새해다.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 과거를 뒤로 하고, 앞으로, 앞으로. 새해를 맞이하는 마음에 예전에 들었던 노래가, 시가 떠오른다. 시노래라는 말이 떠오른다. 다시 듣고 싶어진다. 그 시노래들을.
시노래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팔꽃이라고 시를 노래로 만드는 동인들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아름다운 시에 곡을 붙이는 사람들, 그들이 곡을 붙인 시노래를 듣는 재미를 만끽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사람이 안치환과 김현성이었는데, 어느 날 누가 불렀는지는 모르는데, 시노래에서 마음을 울리는 노래를 들었다.
그 노래를 듣는데 왜 그리 마음이 슬프던지, 마음에 울림이 오래오래 남아 있었는데...
그 하나가 '사이판에 가면'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살아 남은 자의 슬픔'이었다.
노래로 인해 시를 찾아 읽게 되었는데, 민병일의 시집 "여수로 가는 막차"에 이 두 시가 실려 있었다. (사이판에 가면은 31쪽, 살아 남은 자의 슬픔은 41-42쪽에)
과거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우리네 모습이 이 시에 절절히 녹아 있었는데, '사이판에 가면'은 작은 제목이 -녹3 이고, '살아 남은 자의 슬픔'은 작은 제목이 -녹10 이다. 녹이다. 녹. 세월이 흘러 제대로 해결되지 않아 남아 있는 찌꺼기.
그런 녹을 제거해야 하는데, 과연 지금 우리는 이 녹들을 제거했을까? 우리에게는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과거가 있지 않은가.
또 한 해가 저물어 가는데,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아베 정권이 과거를 없던 일로 만들어버리고 있는 중이고, '사이판에 가면'에 나오는 우리나라 그 당시 꽃다웠던 처자들은 이제 하나둘 저 세상으로 떠나고 또 떠날 날을 기다리고 있는데, 수요집회를 아무리 해도 대답없는 그들이, 또 독립운동가의 자손으로 대대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이리도 많은데, 속절없이 또 한 해가 저물고.
이런 역사의 녹들도 우리에게 많이 남아 있는데, 올해 이 위로 얼마나 많은 녹들이 더 생겼던가. 지울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녹들이 우리를 덮고 만 한 해 아니었던가.
이제는 녹을 없애야 하는데, 그 녹 위에 또 다른 녹들이 생기게 하면 안 되는데...
녹을 없애려면 적극적으로 지우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멀리서 지켜보는 것이 아닌,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그 자리에서 충실히 실행해야 한다. 그래야만 녹은 없어진다.
그런 마음. 새해. 그런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해야겠다.
이 시집에 실려 있는 민병일의 또 다른 시 '산'
멀리서 보고 길이 없다고 한탄하는 것이 아닌, 산 속으로 들어가 길을 찾고, 그 길을 따라 산을 오르는 새해가 되도록 해야겠다.
녹이 있다고 포기하지 않고, 그 녹을 없애는 길을 찾아 그 길로 가야겠다. 그게 바로 삶이다.
산
산을 멀리서 보면
길은 보이지 않는다
오봉 암벽에도
길은 굼실굼실 열려 있건만
먼산 바라보며
뒷걸음질치는 사람들에겐
산은 조붓한 마음 한 자락 주지 않는다
산길을 걷다 보면 미끄러지고
온몸으로 바위를 타느라
후들후들 엉금엉금 주춤주춤 서성이지만
산에 기대어보고
산을 휘달려보고
산을 타넘어본 사람들만이
아름다운 산의 향기를 맡는다
산에 부대끼며
바위와 바위 사이에 움츠린 몸 버팅기며
두 발로 일어선 사람들만이
삶의 산 맛을 아는 법,
우리 시대의 산을 넘으러 간다.
민병일, 여수로 가는 막차. 실천문학사. 1995년 초판. 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