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풍경 - 정기용의 건축기행 스케치
정기용 지음 / 현실문화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어떤 사람은 만난 적이 없고, 잘 모르는 데도 이상하게 믿음이 간다. 그 믿음이 웬만해서는 깨지지 않는다. 그가 하는 일이 모두 좋아 보이고,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첫눈에 반한 사람들이 그러려나? 아니면 자신과 맞는 무엇이 있을텐데, 그것을 말로 하지는 못하지만, 감각이 그냥 감응을 해 버린다. 거부할 수가 없다. 그냥 좋은 걸, 그냥 믿음이 가는 걸 어떻게 하겠는가.

 

내게는 정기용이라는 건축가가 그렇다. 그냥 믿음이 간다. 이 사람이면, 이 사람이 말하는 건축이면 좋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의 책을 몇 권 읽지도 않았으면서 말이다.

 

예전에 텔레비전에서 한 기적의 도서관 운동에 그가 건축한 기적의 도서관을 보아서였는지, 아니면 첫책을 읽고 아, 이 사람이구나, 이 건축가로구나 해서 그런지, 하여간 정기용은 내게는 믿을 만한 건축가다.

 

그래서 그가 건축에 대해 하는 얘기에는 귀를 기울이게 된다. 요즘 미술과 건축에 관심이 많아졌는데, 그래봤자 초보자 수준이고, 사실 초보자도 안되는 그냥 제멋대로 생각하고 감상하고 아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미술과 건축이 통한다는 생각은 예전부터 했었고, 건축은 결국 인문학이라는, 사람살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정기용이 쓴 책을 모두 읽고 싶은데, 시간과 돈이 허락을 해주지 않아 망설이고 망설이다 고르게 된 책이 이 책이다. 그가 스케치하고 글을 쓴 결과물들.

 

이제 다시는 그의 새로운 글이 나오지 않을테니, 천천히 시간을 두고 그의 책들을 읽어야지 하면서 고른 책이다. 역시 실망을 주지 않는다. 어느 곳에서 읽어도 좋을 책이고, 아무렇게나 읽으면 안될 책이다.

 

하나하나가 그의 생각이 건축과 자연과 감응을 일으켜 그림으로, 글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 그림이, 글이 감동을 준다. 스케치라서, 그 건축물에 대한 사진이 없어서 보는 재미는 적을지 몰라도 스케치라는 것이 무엇인가?

 

여행 스케치는 기억에 남기고 싶을 정도로 인상적인 것들을 나의 장소로 나의 존재로 끌어들이는 일이면서, 동시에 나의 내면에 잠들어 있는 모든 정보와 연결되는 '무의식적인 행위'다. 스케치로 담을 수 없는 것들은 '언어'의 힘을 통해 가져온다. (9쪽)

 

스케치란 그래서 시다. 소설이나 설명문처럼 자세하게 묘사하지 않고, 자신이 느낀 점을 간략하게 정리하고 있다. 감정이 우선이다. 그 감정을 선으로 나타내는 것, 그것이 바로 스케치다. 그러니 스케치는 많은 것을 담고 있지만, 또 많은 것을 담고 있지 못하다.

 

시가 바로 그러하지 않은가. 다만 간략한 그 표현 속에 우리가 찾아내야 할 것들은 무궁무진한데, 그걸 읽어내는 재미가 바로 시다. 마찬가지로 스케치다. 여행 스케치. 그 스케치를 통해 우리는 작가가 무엇을 보았는지, 무엇을 느꼈는지, 작가는 스케치를 통해 무엇을 가져왔는지를 찾아내야 한다. 그것은 발견이다. 발견의 기쁨.

 

이 기쁨은 건축을 다르게 보게 한다. 건축을 보는 눈을 갖게 한다. 건축을 바라보는 마음을 지니게 한다. 그래서 스케치는 시다. 건축은 인문학이다.

 

하지만 정기용은 말한다. 이러한 스케치로도 부족한 점이 있다면, 그것을 보충하는 수단으로 언어를 동원한다고. 이 책에 나와 있는 스케치와 함께 하는 언어들은 그 자체로 시다. 너무도 많은 울림이 있는.

 

그래서 이 책을 보면서 건축에 대해서 생각하면서도 시를 느끼게 된다. 시를 읽는 것만큼 마음의 울림을 느끼게 된다. 고맙다. 건축이라는 유형물을, 어떻게 보면 딱딱한 고체인 건축을 부드러운 무형물로 바꾸어주고 있다. 언제든지 변형이 가능한 그러한 무형물로 건축을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 말하는 건축들은 장소를 지니고 있다. 시간과 공간이 기억과 함께 하는 곳, 그곳이 바로 장소고, 이 장소에는 역사가, 삶이 담겨 있다. 그런 공간을 그는 스케치와 글을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것뿐이다.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냥 책을 펼쳐 읽으면 된다. 읽으면서 마음의 울림을 경험하면 된다.

 

삭막한 현대 도시... 그러나 이 도시에서도 우리는 울림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건축을 보는 눈이 아닐까 한다. 그 점을 정기용의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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