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홍지수 옮김 / 봄아필 / 2013년 7월
품절


가장 두려운 재앙은 불시에 닥쳐, 논리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혹은 어떤 논리적 이유도 없이 희생자를 낸다. 이 재앙은 제멋대로 폭력을 휘둘러 누가 희생되고 누가 구제를 받을지 예측할 방법이 없다. 오늘날 불확실성은 개인화를 촉진하는 강력한 힘이다. 개인화는 사람들을 화합하게 하기보다는 분열시키고누가 어느 쪽에 속하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공동의 이익'이라는 개념은 점점 모호해지고 결국은 이해 불가능해진다. 두려움, 걱정, 불만은 홀로 삭여야 한다. 개개인이 느끼는 이러한 감정들은 축적되어 '공동의 명분'을 형성하지 않으며, 기반이 되는 구심점도 없다. 따라서 과거처럼 개인들이 서로 연대해서 맞서는 전술이 불가능해지고 예전에 노동계급의 방어적이고 전투적인 조직의 구축과는 사뭇 다른 인생 전략이 필요해진다.-44-45쪽

신뢰가 없다면 저항도 있을 수 없다. 신뢰가 없다면 대립도 있을 수 없다. 피고용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운다면, 자신의 권리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고려될 수 있는 틀을 '유지하는 힘'을 신뢰한다는 뜻이다.-51쪽

지배력을 얻기 위해 질서의 부재, 혼돈을 무기로 사용하는 점이다. 권력투쟁의 전략은 다른 이들의 계산에서 자신을 밝혀지지 않은 변수로 만드는 한편, 자신의 계산에서는 다른 이들에게 변수의 역할을 허용하지 않는 일이다. 간단히 말하면, 지배력을 얻으려면 자기 자신의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규칙들은 제거하는 동시에 다른 이들의 행동을 제약하는 규칙을 가능한 한 많이 만들어내야 한다. 내 운신의 폭이 넓을수록 내 힘은 강해진다. 내 선택의 폭이 좁을수록 권력 투쟁에서 내가 이길 확률은 낮다. -59쪽

오늘날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자신들이 도달할 수 없는 이상적인 수준을 사회가 강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이상의 부재이다. 품위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분명한 방법, 확고하고 안정된 지향점, 삶의 여정에서 예측 가능한 목적지의 결핍이 원인이다. -75쪽

다른 사람들 곁에서 개인이 첫 번째로 깨닫는 점은 다른 이들과 함께함으로써 얻은 유일한 이득은 회복 불가능한 자기 자신의 고독에서 살아남는 방법에 대한 조언, 그리고 누구의 삶이든 삶은 맞서야 할 위험 요소로 가득하고 홀로 싸워야 한다는 점뿐이다.
...개인은 시민의 최대의 적(토크빌)-83쪽

개인이 시민의 최악의 적이고 개인화가 시민정신과 그것을 기반으로 한 정치를 위태롭게 한다면, 그 이유는 개인들이 개인으로서 몰두하고 관심을 갖는 사항들이 공적 영역을 가득 채우고, 공적 영역을 차지할 자격이 있는 유일한 관심사라고 우기면서 다른 모든 것들을 공공의 담론 바깥으로 밀어내기 때문이다. '공(公) '사(私) 점령당했다.-85쪽

민주주의는 제도가 아니라 반제도적인 힘, 곧 변화를 막고,권력층 태생이 아닌 이들을 침묵시키거나 정치적 과정에서 배제하고, 자신들만이 전문성이 있다는 주장을 하면서 통치를 독점하려는 권력의 집요한 특성을 '붕괴'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권력자들은 소수의 통치를 주장하는 반면, 민주주의는 모두를 대표하는 통치이다. 즉, 모두가 동등하게 갖고 있는 특성, 시민권을 기반으로 한 권력이다.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제도를 비판한다. 민주주의는 정치체제에 내재하는 무정부적이고 파괴적인 요소이다. 본질적으로 반대와 변화의 힘이다. 특정 사회가 민주주의인지 알아보려면 그 사회에서 아직 만족스러울 만큼 사회가 민주적이지 않다는 불평이 끊임없이 나오는지 보면 된다.-93쪽

할 수 있는 능력과 하고 싶은 것이 일치하면 행동에 옮기겠다는 확고한 결심이 서게 된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겹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더 많고, 두 가지가 서로 맞지 않을 때 가장 처음 직관적으로 느끼는 것이 모호함이다. 가능성의 부피가 의지의 능력을 초과하면, 모호함은 불안함과 걱정의 형태로 표면화된다. 그 반대의 경우, 즉 도달하고 싶은 상태보다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이 월등히 높아 도달해도 만족스럽지 않을 때 모호함은 불화, 철회, 탈출하려는 절박한 욕구로 표면화된다.-99쪽

당연히 내 형제는 내 책임이다. 내 형제가 내 책임이어야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냐고 묻지 않는 한 나는 도덕적인 사람이다. 내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나는 내형제를 책임져야 한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내 형제의 안녕이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그런 내 형제의 의존성을 인식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도덕적인 사람이다. 내가 그 의존성에 의문을 갖는 순간, 그리고 카인이 그랬듯이 내가 왜 책임을 져야 하는지 이유를 대라고 요구하는 순간, 나는 내 책임을 저버리게 디고 더 이상 도덕적인 사람이 아니다. 의존성과 윤리는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을 수밖에 벗는 관계이다.-120-121쪽

모든 도덕성의 본질은 사람들이 타인의 인권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이므로 이는 또한 한 사회의 윤리적 기준을 평가할 수 있는 척도이다. 이것이 복지국가가 감당할 수 있는 유일한 척도, 복지국가의 평가에 필요한 유일한 척도라고 나는 주장한다.-132쪽

누군가에 대해 책임을 지는 행위는 평생 동안 해야 하는 힘든 일이고 도덕적인 갈등을 겪게 되는 일이며, 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없앨 수 없다. 그러나 도덕적인 사람에게 이는 반가운 내용이다. 사회복지사들은 매일매일 바로 이러한 상황에 처한다.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하고, 옳은 선택이라는 보장도 없고 적절한 선택이라고 확신을 주는 권위자도 없이 선택을 해야 하는 바로 그런 상황에서, 도움을 주는 타자의 책임, 모든 도덕성의 토대가 마련된다.
... 복지국가의 미래는 윤리적 투쟁에 달려 있다.-136쪽

포스트모던 시대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폭력의 양상은 정체성 문제의 사유호, 탈규제화, 분산에서 기인한다고 나는 제안하고 싶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정체성을 구축하는 집단적이고 제도화되고 집중화된 틀의 와해는 의도된 것이 아니라 저절로 발생한 현상이다. -154-155쪽

'공'이 '사'를 지배하려 한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사실이 아니다. 그 반대이다. 공적인 공간을 지배하는 것은 사(私)이다. 사는 사적인 이해와 목적의 언어로 해석될 수 없는 것은 남김없이 공적인 공간에서 몰아내버린다. ... 개인은 시민의 최악의 적이다. -178쪽

근대국가가 질서구축에 관한 한 무력하고 냉소적이라는 점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정치가 뭔가를 할 수 있는 힘(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힘)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정치적 삶과 관련된 모든 기관들이 지역에 발이 묶여 꼼짝 못하는 한편, 권력은 흘러서 그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머무르게 된다.-184-185쪽

빈곤층의 처지를 통해 얻는 교훈은 그들이 누리는 확실성은 우리가 그렇게 혐오하는 불확실성보다도 훨씬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틀림없으며, 일상적인 불확실성이 주는 불안감에 저항하면 즉시 무자비하게 처벌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빈곤층의 모습을 보고 빈곤하지 않은 계층들은 자신의 처지를 얌전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면 그들의 불확실한 삶은 계속된다. 끊임없이 유연해지는 세상과 점점 불안정해지는 자신의 처지를 견뎌내거나 체념하고 받아들인다. 빈곤층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상상력을 가둬버리고 자신의 손에 족쇄를 채운다. 그들은 감히 다른 세계를 상상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나치게 소심해져서 이 세계를 바꿀 엄두를 내지 못한다.-193쪽

'유연성'은 또한 안정의 부재를 뜻한다.
...중요한 생계의 기능은 실존적인 안정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며 이러한 안정감이 없이는 자기주장을 할 자유나 의지를 갖기가 불가능하고, 이러한 자유와 의지는 모든 자율성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이다. 현 상태로서의 일은 생존에 필요한 비용을 제공하기는 해도 그러한 안정감을 제공할 수 없다. -196쪽

모든 교육이 풀어야 하는 영원한 과제, '삶에 대한 준비'는 무엇보다도 매일매일 불확실성과 모호성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능력을 기르고, 다양한 관점이 존재하며 절대 오류가 없고 믿을 수 있는 권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인정함을 뜻해야 한다. 또한 차이를 받아들이고 다를 수 있는 권리를 존중하는 의지를 불어넣어줌을 뜻해야 한다. 자신의 선택과 그 결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용기와 비판과 자기비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강화시켜줌을 뜻해야 한다. '사고의 틀'을 바꾸고 자유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고, 새로운 미지의 세계가 안겨주는 기쁨과 함께 선택의 어려움이 주는 불안감도 아우를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줌을 뜻해야 한다.-226쪽

너무 잘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으며,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눈에 띄지 않는다. 사물은 사라지거나 파괴됐을 때 눈에 띈다. 우선 '기정 사실' 상태에서 벗어나야 그 사물의 본질에 대한 탐색이 시작되고 그 사물의 기원, 쓸모, 가치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한다.-230-231쪽

미래에 대한 전망에 의거해서 현재를 전환하려면, 조금이라도 현재를 장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현재에 대한 장악력, 즉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우리가 사는 유형의 사회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다. 함께 힘을 모아 게임의 법칙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우리를 두렵게 만들고 참혹한 결과로 고통받게 만드는 위험의 근원은 사회적 집단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위험은 무차별적으로 개인들에게 가해져 개인적인 문제가 되고, 이 문제는 오로지 개인이 홀로 직면해야 하고, 수습한다고 해도 오로지 개인의 노력을 통해서만 수습할 수 있다.-243쪽

우리는 진정으로 중요한 일을 할 수 없게 되거나 할 수 없다고 믿게 되면, 덜 중요한 일들로 관심을 돌리거나 우리가 할 수 잇거나 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외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 중요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는 문제들로부터 덜 중요하거나 전혀 중요하지 않지만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로 관심이 옮겨간다. 가장 두드러진 현상이 충동구매이다.-245쪽

삶이 분산되면 삶을 단편처럼, 개별적인 사건들의 연속처럼 살게 된다.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하면 존재가 파편으로 나뉘고 살미 단편으로 쪼개진다. 불안감이라는 망령을 처치하지 않는 한 오래 지속되는 가치에 대한 믿음을 회복할 가능성은 요원하다.-261쪽

사랑은 가치와 관련이 있는 반면 이성은 쓸모와 관련 있다. 사랑의 눈으로 본 세상은 가치의 집합이다. 이성의 눈으로 본 세상은 쓸모 있는 사물들의 집합이다.
.. 가치는 사물의 질이지만, 쓸모는 사물을 사용하는 사람의 속성이다. -268쪽

용도와 가치 지향성에서 이성과 사랑은 각자 다른 길을 가게 된다. -270쪽

이성은 자기 자신에 대한 충실함을 권장한다. 반대로 사랑은 타자와의 연대를 요구한다. 따라서 더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 대상에 자신을 종속시킨다.-272쪽

정의라는 개념은 (타자에 대한 도덕적 책임에서는 기정사실인) 유일무이함의 경험과 (사회적 삶에서 기정사실인) 다수의 타자들에 대한 경험이 만나는 순간 잉태된다.
... 윤리의 '주요 장면'은 또한 사회정의의 주요 장면이자 사회 정의보다 먼저 발생한 장면이기도 하다.-296쪽

기술 발달과 정치의 무력함으로 시간적 공간적 거리가 와해되면서 인간이 처한 여건이 향상되기는커녕 양극화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으로 어떤 이들은 영토적 제약으로부터 해방되고, 공동체가 창출하던 의미들이 지역적 공동체 바깥에서 창출된다. 또 한편으로는 여전히 지역적으로 발이 묶인 이들의 삶의 터전은 공동체의 의미와 정체성을 부여하는 능력을 박탈당한다. 어떤 이들은 무릴적인 장애물로부터 해방되어 전례 없는 자유를 누리고 지금까지 들어보지도 못한 이동성을 누리며 먼 거리를 자유롭게 이동한다. 어떤 이들은 지역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의 터전을 자신에게 알맞게 가꾸기도 불가능해진다. -309쪽

민주주의는 공과 사 사이에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소통이다. 사적인 문제들을 공적인 이슈로 탈바꿈시키고 공공의 안녕을 사적인 과제와 프로젝트로 재구성하는 일이다.
... 해석이라는 과업이 아직 달성되지 않았다는 의구심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사회, 아직 만족스러울 만큼 민주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회라야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 공과 사 사이의 소통과 해석이 가능하고 실용성이 있으려면 사회의 자율성과 사회 구성원들의 자율성이 있어야 한다. 시민들은 자율적이어야 한다.-328-3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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