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참 좋게 읽었던 시집이다.

 

이 시집에서 마음에 들었던 시도 꽤 있었고... 무엇보다 시가 어렵지 않다고 생각해서 더 좋았고.

 

제목이 "시간의 그물"이다 보니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변한 자신에 대한 이야기, 세상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는데, 그 중에서는 이미 변해버린 고향, 즉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이야기와 변한 세상에 대한 이야기, 따라서 상실의 아픔을 이야기하고 있는 시들이 제법 있었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어릴 적에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했는데, 그 땐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세월의 무게를 느끼는 나이가 되어가고, 세상이 점점 더 무거워지고, 나 자신은 점점 더 작아지고... 꿈은 사라지고, 현실은 어두워지고, 갈 길은 먼데, 앞은 보이지 않는 듯하고...

 

시집을 넘기면 처음에 이런 시가 나온다.

 

신발

 

신발의 문수 바꾸지 앟아도 되던 날부터

하나 둘씩 내 곁을 떠나간 친구여

하나 둘씩 내 곂을 떠나간 꿈이여

 

이재무, 시간의 그물, 문학동네. 1997년 초판. 11쪽

 

나이를 먹어감은 상실과 통하는 나이, 현실적이 되어갈수록 점점 자신의 꿈과는 멀어지는 나이. 어릴 적 자신을 잃어가는 나이. 그런 나이듦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신발의 문수.

 

신발의 문수를 바꾸지 않아도 되던 날, 이는 어른이 된 날이고, 어른이 되었음은 현실적이 되었음이고, 현실적이 되었음은 삶에 자신이 얽매이게 되었음이고, 삶에 얽매이게 되었음은 친구들과 만나는 횟수를 줄이는 나이가 되었음을, 많은 꿈들을 접고, 오로지 생활을 위해서 전념하는 나이가 되었음을, 씁쓸하지만.. 그런 나이듦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육체적인 나이는 먹을수록 꿈을 잃어가겠지만, 정신적인 나이는 먹어도 먹어도 꿈을 잃은 나이는 아닐터...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신이 시대의 변함이 결코 좋은 쪽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일 터이다.

 

하여 이런 나이듦에 대한 시가 한 편 더 있다.

 

마흔

 

몸에 난 상처조차 쉽게 아물어주지 않는다

그러니 마음이 겪는 아픔이야 오죽하겠는가

유혹은 많고 녹스는 몸 무겁구나

 

이재무, 시간의 그물, 문학동네, 1997년 초판. 99쪽

 

불혹의 나이. 그러나 몸이 무거워지고, 미혹되지 않음은 어쩌면 도전하지 않음의 다른 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이 시가 하게 한다. 그래, 나이듦은 어쩌면 안주일지도, 그 안주를 통해 몸은 점점 무거워지고, 정신은 도전을 포기하는, 하여 실패로 인한 마음의 아픔은 회복 불가능할 수준까지 이르는 그런 나이.

 

그렇다고 나이 먹었다고 주저앉을 수만은 없는 일. 녹스는 몸, 무겁더라도 움직여야 한다. 움직임이 바로 우리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이런 나이듦에 대한 시 속에서 요즘 정치 상황과 맞물려 내 눈에 쏙 들어온 시가 있었으니..

 

                        도배공

 

이미 벽과 한몸이 되어버린 낡은 벽지

벗겨내는 일 여간 고되지 않다

보라, 안간힘으로 버티는 저 완강한

기성의 아집과 집착을

그는 그만 이쯤에서 오래된 고집과 타협하고 싶어진다

갑자기 그는 일을 서두른다

낡은 벽지는 더 많이 아주 오래 살아남는다

 

이재무, 시간의 그물, 문학동네, 1997년 초판. 78쪽

 

우리들이 바로 이 도배공과 같지 않았을까... 낡은 벽지를 싹 걷어내고, 아주 말끔하게, 완전히 걷어내고, 그 자리를 깨끗이 청소하고, 그 다음에야 새 벽지를 발라야 하는데, 우리는 힘들다는 이유로,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또다른 이유로 낡은 벽지를 완전히 걷어내지 않고, 그 위에 그냥 새 벽지를 덧붙이지 않았던가...

 

곰팡이가 슬어있는 벽지 위에 바른 새 벽지. 과연 새 벽지 역할을 할까. 지금까지 우리가 발랐던 벽지들은 이런 낡은 벽지 위에 발랐기에 이상하게도 새로운 느낌을 주지 못하고, 낡은 느낌을, 곧 곰팡이가 스는, 쾨쾨한 냄새를 풍기는 벽지로 변하게 하지 않았을까.

 

우리나라 정치가 이렇지 않았을까. 정치를 이렇게 만든 장본인은 바로 우리들이 아닐까. 우리는 정말로 새 벽지를 바를 마음을 지니고 있었던가. 그냥 눈 가리고 아웅이라고, 대충 더러운 것들이 보이지 않게만 가리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먼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새 벽지 안 쪽에 얼마나 많은 낡은 벽지들이 존재하고 있는가, 그 썩어버린 벽지들이 새 벽지까지 썩게 하고 있지는 않았던가.

 

뉴스를 보기가 싫어진 지는 오래되었지만, 그래도 세상 돌아가는 꼴은 알아야지 하고 보다보면 낡은 벽지에서 스며나오는 그 더러움이 새 벽지도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만들어버리고 있음을 보게 된다.

 

눅눅해진다. 마음이... 그러면 안되는데... 이제는 정말로 깨끗이 긁어내고, 그 위에 새로운 벽지를 발라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이재무의 시집... 어쩌면 나이 들어감에 대하여 쓴 시들이기도 하겠지만, 낡음을 제거하지 않고, 낡음 위에 덧붙여진 새로움이 얼마나 위태로운가를 보여주는 시들도 상당수 있으니... 세월은 우리 육체를 늙어가게 하겠지만, 반대로 우리의 정신은 더욱 젊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

 

이 시집을 읽으며 그래야 한다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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