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을 고를 때, 우선 아는 시인인가? 혹 내가 시를 알고 있는 시인의 시집인가? 또 제목이 마음에 꽂히는가? 그리고 몇 장을 넘기다 마음에 드는 시가 있는가?

 

헌책방에 가면 시집은 천천히 감상할 수가 있다. 새 책을 파는 서점처럼, 헌책방에서도 역시 시집은 자리를 얼마 차지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적하게 시집을 보고, 내용을 훑어본다. 거기에다 제본 상태나 보관상태까지.

 

이런 과정을 거쳐 이 시집이다 하면 손에 쥐고, 다른 책들을 보기 시작한다.

 

이 시집, 박용주의 "바람찬 날에 꽃이여 꽃이여"는 알고 있는 시가 두 편이 있다. 그리고 박용주가 나중에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학생일 때 이 시집을 냈다는 사실 때문에 알고 있었고, 그 중 한 편의 시는 아는 사람에게서 받기도 했었다.

 

이럴 경우 망설일 이유가 없다. 우선 내가 알고 있는 시가 두 편이고, 이 시인의 시집을 구하기가 쉽지 않을 터이니, 그냥 사고 본다.

 

참 오래 전의 시집이다. 그리고 박용주는 정말 어릴 때 시를 썼다. 중학교 3학년.

 

지금 중학교 3학년 하면 어리다는 생각이, 도대체 저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 시집을 읽으면 이게 어떻게 중학생이 생각해내고, 중학생이 표현할 수 있는 시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마치 어른이 쓴 시 같다는 느낌. 너무도 조숙한 것 아닌가 하는 느낌.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사람의 정신이라는 것이 꼭 육체적인 나이와 비례하는 것은 아니니, 박용주가 조숙했다고 해도 그의 시는 조숙이 아니라, 표현할 수 있는 내용을 표현할 수 있는 형식에 맞추어 냈다고 보는 편이 좋겠다.

 

그만큼 그의 시에서는 중학생의 냄새가 나지 않는다. 기존 어른들이 고민했던 것보다 더한 고민이 시에 담겨 있기도 하다.

 

어쩌면 지금 아이들을 우리는 너무 어리게만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이들 마음 속에도 이미 어른과 같은 마음이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억누르고만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시집을 읽으면... 이 시집의 주된 음조가 오월이라면, 이제 오월은 지났다. 유월도 칠월을 향해서 달리고 있으니...

 

우리도 그 빛나던 광주를 거쳐 87년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그동안 박용주가 어떻게 자랐을지 몰라도, 그의 시 구절은 '우리들의 가슴에 아픔으로 피어나는 / 순결한 꽃'(박용주, 목련이 진들 중에서)으로 다가온다.

 

그의 시 중에 내가 알고 있던 두 편 중 하나.

 

사실, 이 시집에서는 첫번째에 실린 '목련이 진들'로 5월 문학상을 탐으로써 그가 유명해졌으니, 이 시를 인용해야겠으나, 내가 기억하고 있던 시를 인용한다. 이 시처럼, 정말 더러움이, 이 세상의 더러움이 가려졌으면 해서...

 

이 세상의 더러움을 없애고 새로움이 나타난 세상이 되었으면 해서...

 

자기만 깨끗해진다고 부끄러워하는 시인을, 자기조차도 깨끗해지지 않고 있는 나 자신이 더욱 부끄러워서.. 그런 나보다도 못한 사람들이 더욱 창피해서...

 

벽지를 바르며

 

누렇게 바랜 낡은 벽지를 떼어내고

깨끗이 물걸레질을 하여

산뜻한 새 벽지로 도배를 하면서

 

한쪽으로만 밀려도 아니되고

빈틈없이 풀칠하여

무늬맞춰 벽에 바르며

문득 이 세상의 모든 낡은 것에

풀칠하고 싶었다

 

지켜본 세월만큼 햇볕에 바래고

더러움타고 먼지타서 낡아진 세상을

음습한 습기로 눅눅해진 세상을

빠삭거리는 새 종이로 바르고 싶었다

 

교만하고 음흉하여 어두운 벽엔

희고 밝은 종이로

슬프고 눈물나는 여린 색깔엔

화사하고 산뜻한 꽃무늬로 도배하고

좌절하고 고통하는 우울한 벽에는

연록으로 반짝이는 싱그러움을 입혀서

밝고 고운 세상으로 풀칠하고 싶었다

 

간혹은 은은한 상아 빛깔로 호사도 하고

등꽃같은 보라빛 고고함도 함께 칠해서

새롭게 태어나는 세상을 보고 싶었다

 

낡고 바랜 것이 벽지만은 아닌데

이 한 칸 벽만을 새로 바른다해서

세상의 더러움이 함께 가려지는 것도 아닌데

 

행여 무늬 틀리지않나 근심하며

내 기대일 벽만을 풀칠하는

이기심을 부끄러워 하면서

내것만을 깨끗하고 밝게 하는

이기심이 슬프기만 해서

풀칠하는 손길이 자꾸만 더디어진다

 

박용주, 바람찬 날에 꽃이여 꽃이여, 장백, 1990년. 77-7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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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wang0917 2019-06-14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용주 시인은 한 맺힌 오월을 가슴 시리게 노래했어요. 시를 쓸 당시 나이가 중학생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절절한 슬픔을 끓어 냅니다. 어른이 된 지금 읽어도 최고라 말할 수 있어요.
그 후로 시를 쓰지는 않는다고 들었는데......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순천여고 시절 소식 주고 받았던 친구였는데 기억하고 있을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