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 카프카 전집 3
프란츠 카프카 지음, 이주동 옮김 / 솔출판사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소송"이다. 재판에 걸려 들었다.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른 채. 어느 날 잠에서 깨어보니 낯선 사람들이 와 있고, 자신의 소송을 당해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죄목도 없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런데 누구나 알고 있다. 자신이 소송에 걸려 있다는 사실을. 소송에 걸려 있음에도 구속이 되지 않고, 요즘 말로 하면 불구속 상태에서 소송이 진행된다. 일상 생활을 하되, 이미 예전과는 다른 일상이 시작된다.

 

이렇게 시작한다. 불시에, 도대체 예고도 없이, 이유도 없이 소송이 시작된다. 그리고 판결도 없이 죽임을 당한다. 소송에서 죽음까지 소설은 이어지는데, 왜 그런지는 끝까지 알지 못한다. 도대체 그의 죄가 무엇이란 말인가.

 

소설을 읽어가서 끝부분에 다다라도 그의 죄는 밝혀지지 않는다. 그냥 소송당하고 재판받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죽을 뿐이다. 이게 도대체 뭔가?

 

그러니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책의 후기에 있는 번역자의 말대로 카프카는 이곳과 저곳의 경계에 놓인 작가, 현실과 몽환 사이에 놓인 작가라고 한다면, 현실과 비현실이 교묘하게 섞인 작품을 의도적으로 쓴 작가라면 우리는 그의 작품을 어떻게 읽어야 하나?

 

그냥 읽어가기도 그렇고, 하나하나 해석을 하면서 읽기도 그렇고, 읽은 다음에 환상적인 내용이군 하고 말 수도, 이 작품의 의미는 이렇다고 단정지을 수도 없는 그런 상태...

 

비평가들이 밥 먹고 살기 딱 좋은 작품, 연구자들이 성과를 내기 딱 좋은 작품, 이상이 자신의 작품에 유머와 위트와 퀴즈들을 막 섞어 놓았다고 찾아보라고 하듯이 카프카 자신도 자신의 작품을 통해 독자들과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인가.

 

어떤 해석도 들어맞고, 어떤 해석도 들어맞지 않는, 그러한 작품이라고 해야 한다. 그렇다고 재미가 없냐? 아니다. 이상하리만큼 읽을 마음이 드는 작품이다. 해석도 안되는데...

 

미완성된 작품이라고 해야 하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결말은 완성이 되어 있다. 중간에 더 많은 내용을 넣으려고 했던 것 같은데, 작품의 결벽성을 지닌 카프카가 미처 완성하지 못한 작품이 친구인 브로트의 덕으로 빛을 보았다고 해야 한다. 물론 브로트가 나름대로 편집하고 수정해서 카프카의 의도가 왜곡된 경우도 있단 비판이 있지만, 그래서 이 책은 브로트판이 아닌, 그 뒤에 가능하면 카프카의 의도대로 편집한 비판본인데, 이런 비판본이 나올 수 있게 해준 것도 브로트의 공임은 부정해서는 안될 것이다.

 

제목이 소송이니 화가의 이야기에서도 재판에 대한 내용이 나오고, 또 이 소설의 뒷부분에 나와 있는 '법 앞에서'라는 비유를 중심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에 더 첨가할 필요는 없을 듯하고.

 

카프카에 대한 오독을 덧붙이는게, 이런 오독들이 모여 카프카에 대한 해석을 이룬다고 보면, 나는 소송을 읽으면서 신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읽었다.

 

죽음에 대한 판결은 느닷없이 온다.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고, 무언가 높은 대상에 호소하려고 한다. 난 억울하다고, 더 살아야 한다고, 내가 무슨 죄를 지었냐고. 그러나 그럴수록 그는 무궁한 미지의 늪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판결은 바뀌지 않는다.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그는 그 죽음 너머의 세계에 대해서 미리 알고자 하지만, 마치 그 죽음 너머를 알고 있는 듯이 말하는(사실 모르면서) 문지기에 의해 문턱에서 저지당하고 만다. 그리고 죽음 너머를 보지 못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다. 모든 죽음에 보편성이 있는 것 같지만, 죽음은 철저히 개인적이다. 그래서 죽음에 이르는 문에는 자신만의 문이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도 해보고, 아니면 이것이 펠리체와 파혼을 한 다음에 쓰여졌다고 하니, 혹시 결혼에 대한 이야기?

 

사랑은 느닷없이 어느 순간 찾아온다. 그리고 그 사랑을 거부하려야 할 수가 없다. 결혼이라는(카프카에게는 문학의 죽음?) 최종 판결을 향해 갈 수밖에 없다. 여기서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벗어나려 하지만, 벗어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결혼의 본질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결혼했다고 해도 그 본질을 알 수 없다. 내가 한 결혼은 철저히 현실적인, 개인적인 결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결혼은 과거의 나를 죽게 한다. 새로운 나를 만들어 낸다. 즉, 결혼에 대한 판결은 과거의 나에 대한 죽음 선고라고 할 수 있다.

 

아님, 이런 생각?

 

왜 30살일까? 30이란 나이... 공자는 이립(而立)이라고 하여 홀로 설 수 있는 나이라고 했고, 김종길의 '성탄제'라는 시에서는 '서러운 서른 살'이라고 했으며, 김광석이 부른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에서는 '자꾸만 멀어져 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 소설은 30살에 시작해 31살이 되는 생일 전날 끝난다. 그렇다면 30은 과거의 나와 결별하고 새로운 나로 살아가야 하는 나이, 때이지 않은가. 과거의 나와 결별하지 못하면 그것은 새로운 삶을 살 수 없다. 그러나 누구도 그 이후 삶의 본질이 어떤지는 알 수 없다. 인간의 삶에서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없기에, 우리는 모두 피상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기에 삶의 진실(법) 밖에서 헤매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죽음을 통해 조금더 삶의 본질에 다가서지 않을까 하는 생각.

 

다들 억측에 불과하지만, 참 다양하게도 해석될 수 있겠단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런 다향한 해석을 하게 만드는 데서 카프카의 작품이 여전히 읽히고 있는지도 모른다.

 

덧글

 

작품을 읽다보니 이 책 220쪽에 요제프 카가 성당에 도착했을 때 "그가 성당에 도착했을 때 막 열한 시를 쳤다."고 되어 있는데, 그가 성당에서 시간을 보내고 신부와 대화를 하기 직전에 224쪽에 "그는 시계를 보았다. 열한 시였다."고 되어 있는데... 이게 오타인지 아니면 카프카가 그렇게 썼는지 모르겠다. 일부러 시간의 흐름을 멈추게 했다?

 

이 앞을 보면 이탈리아인을 만나기로 한 시간은 10시이고, 요제프 카는 9시 반에(약간 지체되긴 했지만) 은행에서 출발했으므로, 앞에가 열 시여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작가의 의도인지, 이 책의 오타인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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