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가 한 풀 꺾이고 있다. 아무리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더라도, 지구온난화라 하더라도 계절의 흐름을 아직은 이길 수 없나 보다. 입추와 말복이 지나가고 있으니, 비가 한 번 내리고 나면 바람에 시원한 기운이 실려서 우리 몸에 다가오리라.
이번엔 함민복 시인의 시집을 골랐다. "긍정적인 밥"처럼 많이 유명해진 시가 있는 시집이었으면 더 좋았으려나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시집, 좋다. 유명해진 시와 시집의 좋음은 상관관계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그 시집은 "말랑말랑한 힘"
함민복의 시집을 고른 이유는 단순하다. 강화도로 쉬러 갈 예정이기 때문이다. 함민복 시인은 강화도에 살고 있다고 알고 있기에, 강화도에 가기 전에 그 시인의 시를 다시 한 번 읽어보자고 펼쳐들었다.
총 4부로 되어 있는데, 시들이 길지 않고, 각 부분에서 마음에 드는 시들이 물 속에서 숭어가 뛰듯이 막 뛰쳐 나온다. 싱싱하다.
다른 시들이야 넘어간다 쳐도, 이 시집에는 특히 섬 생활에 관한 시들이 많다. 물고기를 낚는 일, 뻘에 관한 일들이 시로 넘쳐나고 있다.
그 중에 우선 물과 관련된 시를 하나 보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수직과 수평이 늘 교차하는 것만이 아닌, 수직을 통한 수평의 성립.
물
소낙비 쏟아진다
이렇게 엄청난 수직을 경험해 보셨으니
몸 낮추어
수평으로 흐르실 수 있는 게지요
수평선에 태양을 걸 수도 있는 게지요
함민복, 말랑말랑한 힘, 문학세계사, 2005년 초판 3쇄. 물 전문
이 시를 거꾸로 읽으면 가장 낮은 것이 가장 높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최고를 경험했기에 자신을 한껏 낮출 수 있다는 사실. 예수를 보아도, 부처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자신을 높이는 사람, 이 사람은 결코 높은 사람이 될 수 없다. 진정 높음을 안다면 자신을 낮추고, 자신을 평평하게 만들어 누구나 자신에게 다가올 수 있게 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 태양을 걸 수 있듯이 높은 성취를 얻을 수 있게 된다.
시인은 쏟아지는 비, 수직으로 땅을 향해 맹렬히 내리꽂는 비를 보고, 하늘을 경험한 존재로, 그래서 그런 수직을 통해 수평이 된 존재로 파악하고 있다. 진정 하늘을 아는 자는, 자신을 낮춘다. 이런 사람, 시인은 바란다. 그래서 "기호 108번"이란 시에서 '국민들을 위하여 일하겠다고 / 말을 파신 분이나 / 말을 파실 분들은 / 중생들이 다 극락왕생할 때까지 / 성불하시지 않겠다는 / 기호 108번 / 지장보살님 꼭 한 번 생각해주세요'(기호 108 부분)라고 한다.
수평이 되지 못한 존재들, 그들은 자신들을 되돌아볼 줄 알아야 하고, 겉으로만 하는 반성이 아닌, 뼛속까지 스며드는 반성을 해야 한다.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말로만 죄를 느끼지 말자 / 검처럼 신성한 / 죄란 말 / 오염시키지 말자'(죄 부분)
이런 삶의 태도를 지니고 있는 시인이기에, 도시의 생활을 견딜 수 없어 한다. 도시의 삶은 경직되어 있는 딱딱한 것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반면 시인은 말랑말랑한 삶, 그러한 삶을 추구한다. 도시의 삶이 빛이라면 농촌의 삶, 어촌, 산촌의 삶은 그림자다. 그러나 시인은 빛을 추구하기 보다는 그림자를 추구한다. 오죽하면 이 시집의 2부가 "그림자"겠는가.
그림자가 부정적으로 쓰이기 보다는 우리네 삶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그 어떤 무엇이라고 봐야 하고, 우리가 그림자에 관심을 가질 때 비로소 우리 삶은 빛과 그림자가 균형을 이루는 수평적 삶, 평평한 삶을 이루게 된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부드러운, 말랑말랑한 것들에 애착을 지닐 수밖에 없다.
시집 제목이기도 한 '말랑말랑한 힘'을 보자. 울림소리들의 반복으로 운율이 입안에서 저절로 살아나는 시. 시 자체도 정말로 말랑말랑하다.
뻘
말랑말항한 흙이 말랑말랑 발을 잡아준다
말랑말랑한 흙이 말랑말랑 가는 길을 잡아준다
말랑말랑한 힘
말랑말랑한 힘
함민복, 말랑말랑한 힘, 문학세계사. 2005년 초판 3쇄. 말랑말랑한 힘 전문
강화도에 가서 나도 뻘에 발 한 번 담가야 겠다. 말랑말랑한 힘을 느껴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