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말이 이제는 신물이 날 정도로 반복되었다. 좋은 말도 자꾸 하면 듣기 싫은 소리가 된다는데, 무더위, 무더위 하다 보니, 이젠 무더위 소리만 들어도 땀이 솟는다. 시원한 빗줄기가 그립다.


기우제라도 드려야 하나. 예전 같으면 왕이 기우제를 올렸을 텐데... 자신의 책임으로 통감하고 몸둘 바를 몰랐을 텐데. 기우제로 실제 비가 오든 오지 않든, 적어도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이려고는 했는데... 누구나 다 아는 말인, 녹조야 더위가 오면 자연스레 따라오는 거라는 말은 하지 않았을 텐데... 그걸 다들 알기에 그런 일을 겪지 않기 위해 대책을 세우는 것 아니겠는가.


서정춘의 시집을 읽었다. 마음에 비가 내리게. “죽편”과 “봄, 파르티잔”

워낙 짧고 또 분량도 적어서 이 시인의 시집 두 권을 읽는 일은 다른 시인의 시집 한 권을 읽는 일보다 시간이 적게 걸린다. 단지 물리적인 시간만을 따지면.


그러나 시 한 편 한 편이 만만치 않다. 백 편, 천 편, 만 편의 시보다는 영원히 남을 시 한 편 쓰기를 원하는 시인답게, 시는 짧고 양은 적지만 무게가 상당하다. 책 표지에 나와 있는 말 ‘시를 쓰기 위해 시인이 되어야지, 시인이 되기 위해 시를 써서는 안된다’는 말을 몸으로 실천한 시인이다.


그의 시 중에 이번 무더위와 관련된 시가 있다. 무더위 보다는 가뭄에 관련된 시지만, 지금은 한 줄기 비가 그리운 때이니...


가뭄타령


하늘이 독약같이 멀어 버렸다

어느 무덤을 파고

어느 빈 항아리를 묻어야 비가 오려나

아트홀 호암 콜렉션에 틀어박혀서

목이 마르다 실토를 하듯

금이 쩍쩍 가고 있는

청화백자운용문항아리

이것을 훔쳐서 묻어 주면

비구름을 몰고 청룡은 날고

청화백자난국문항아리

이것을 묻어 주면

물 먹은 산야(山野)에 도로 난초는 푸르고

야국(野菊)은 필까 말까

아즐타, 건곤(乾坤) 삼천리가

푸르 청(靑)이리


서정춘, 죽편, 동학사. 2002년 2판 가뭄타령 전문

(원래 시집에 있는 시에는 한자어가 그냥 쓰였다. 이것을 한글로 바꾸고 괄호 안에 한자로 집어넣었다. 본래는 시인이 쓴 대로 그냥 읽어야 더 맛이 나는데.. 한자를 모르는 세대가 더 많아지는 세상이니...)


재미있는 발상 아닌가. 문화재에 새겨진 그림에 기대어 비를 소망하는 모습. 지금은 무엇에 기대어 소망해야 하나... 우리가 초래한 일이 더 많으니 말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나라는 이 시의 마지막처럼 푸르 청이다. 푸르 청(靑). 푸르르다. 너무.


이 시집에서 압권은 역시 제목인 죽편이다. 그것도 죽편1. 짧은 시행에 많은 내용들이 담겨 있다.


 

죽편(竹篇) 1

- 여행


여기서부터, ―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년이 걸린다


서정춘, 죽편, 동학사. 2002년 2판 죽편1 전문


대나무와 기차, 외형상 유사성이 있다. 여기서 착상을 했나 보다. 그러나 대꽃이 피는 마을이 어디일까? 시인의 고향? 아니면 우리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곳? 어디든 상관이 없다. 다만 그곳까지 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우리 인생을 100년으로 치면 우리는 우리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기까지 멀고 먼, 길고 긴 여행을 해야 한다. 이 시는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을까? 대꽃은 웬만하면 피지 않는데, 그 대꽃이 한 번 피면 대나무는 죽고 만다는 얘기를 본 적이 있는데.


다른 시집인 “봄, 파르티잔”도 마찬가지로 짧은 시들이 모여 있다. 그 중에서도 이런 기막힌 시가 있나 한 생각이 들게 한 시


우리나라 수평선


우리나라여거울에금간삼팔선이여하늘반물반이여모든쪽빛이여우리나라수평선이여


서정춘, 봄, 파르티잔, 시화시학사. 2001년. 초판. 우리나라 수평선 전문


기가 막히지 않은가! 수평선은 다 똑같은 수평선이어야 하는데, 시인은 우리나라 수평선의 특수성을 찾아내고 있다. 그걸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제목보다도 한참 작은 글씨로 한 줄로 가로 지르는 수평선을. 그 속에 우리의 현실을 담아내고 있으니... 이 짧은 한 줄에 분단된 우리나라의 모습이 들어가 있으니.


다른 시에서도 시인은 수평선의 이미지를 시에 많이 등장시킨다. 그 때마다 다른 모습의 수평선이 나오는데...‘유리창’이란 시에서도 수평선이 나오고, 아예 제목이 ‘수평선’인 작품도 있다. 또 이 시집에는 도마뱀이 나온다. ‘도마뱀붙이’, ‘도마뱀을 좇아서’, ‘도마뱀을 살려라’,‘도마뱀이 피아노를 치다’ 재미있는 표현이다. 생각해 볼 표현이다.

 

마지막으로 서정춘 시인의 사랑에 관한 시 한 편.

아, 우리의 사랑은,

이 놈의 사랑은 정말.


당신


당신, 돌을 던져서 쫓아버릴 수 없고

당신, 칼로 베혀서 쳐버릴 수 없다

차마, 사랑은 물로 된 육체더라


서정춘, 봄, 파르티잔, 시화시학사. 2001년. 초판. 당신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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