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되는 무더위. 인간이 만들어낸 악순환의 고리 속에서 더위는 더욱더 니들이 그랬지, 니들이 그랬어 하면서 우리 곁에 머문다. 밖에 나가면 엄청난 열기가 온몸을 감싼다.
공식적으로 이야기하는 온도보다 내 몸이 느끼는 온도가 엄청나게 더 높다. 더 높을 수밖에 없다. 내 몸은 열기에 포함되어 있는 찐득찐득함까지도 느끼니 말이다.
피서를 떠나야 하는데... 어디로 간들, 사람을 피할 재간은 없고... 피서가 아니라 오히려 더 더위를 먹고 오기 십상인데...
집 안에 있자니, 그것도 고역이다. 도무지 방에 있을 수가 없다. 몸이 끈적끈적, 견딜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에어컨을 틀기도 그렇다.
예전에는 탁족이라고 해서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시원한 수박을 먹든지, 아니면 발을 담그고 시 한 수를 읊기도 했다는데...
도심에서 계곡을 찾기도 힘들고, 계곡까지 가기도 그렇다.
하여 대안으로 시집을 읽어봐야지... 한 번 일별하고는 책장 속에 고히 쌓아두어썬 시집 중에 마음에 가는 것들을 꼽아서 잃어봐야지... 하는데...
물론 시집을 펼쳐든다고 해서 더위를 잊지는 못한다. 그러기에는 이번 더위는 너무 심하다. 온몸을 감싸고 있는 더위를 그래도 잠시 잊을 수 있는 시들, 시집들. 세상에 그런 게 있을까 싶기도 한데...
우선 제목을 보고 뽑았다. 고정희의 "지리산의 봄" 고정희 하면 지리산, 그리고 뱀사골...
예전 해남에 갔을 때 고정희 생가라는 이정표를 보고 한 번 가보고 싶었지만, 일정 상 김남주 생가만 들르고 말았는데... 언제 내가 고정희의 시집을 샀더라 기억도 가물가물한데...
시집에 찍혀 있는 날짜를 보니 1997.6.2라고 되어 있다. 참 오래 전에 산 시집이구나. 이것도 초판은 아닌데... 이 시집은 1987년에 나왔다. 우리나라 격동의 시기에.
그래서 그런지 이 시집에는 1980년대 우리 사회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시원하다기보다는 그 때를 회상하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가끔은 슬퍼지고, 지금이나 그 때나 도대체 나아진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하기도 한다.
민족의 영산인 지리산, 저항의 산이기도 하고, 포용의 산이기도 한, 시인 자신의 마지막을 보낸 산. 그래서 이 시집은 애틋하다. 좋은 시들이, 지금 그 때를 생각하며 가슴을 울리는 시들이 많은데...
이 구절 하나, 예전에 줄 쳐놓은 그 구절이 새삼 마음에 와닿는다.
단 한번의 이윽한 진실이
내 일평생을 버티게 할지도 모릅니다 - 천둥벌거숭이의 노래 10 마지막 부분
한 번의 이윽한 진실로 고정희는 일평생을 살아갔을 것이다. 아마도 예전의 나는 이 시집을 산 다음에 고정희의 시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 한 권을 더 샀으니 말이다. "이 시대의 아벨"

고정희는 기독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시 내용에서도 기독교에 관한 내용들이 많이 나온다. 제목도 "이 시대의 아벨"이지 않은가. 그런데... 그 아벨은 바로 우리들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이 시대를 아벨처럼 살고 있지는 않은지...
이 시집에서는 무거운 내용도 있지만, 사랑법 첫째와 같이 참 서정적인 시도 있다. 시대를 힘겹게 살아갔지만 마음에서부터 우러나는 서정성을 잃지 않았던 시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중에 해남 방면으로 여행을 갈 일이 있으면 꼭 고정희의 생가를 들러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더운 날, 고정희 시집 두 권을 읽으면서...
더운 날들이 연속되니 무거운 시보다는 고정희의 시 중에서 서정적인 시 한 편
고백
- 편지 6
너에게로 가는
그리움의 전깃줄에
나는
감
전
되
었
다
고정희 "지리산의 봄" 문학과지성사 1992년 5쇄 110쪽 고백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