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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 - 제30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ㅣ 민음의 시 179
서효인 지음 / 민음사 / 2011년 12월
평점 :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적이라고 아도르노는 말했다는데, 시가 시로서 성립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한탄일텐데, 오히려 이러한 시대일수록 시가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데, 근대라는 시기를 혁명의 시대, 또는 폭력의 시대라고 하고, 현대를 정보화의 시대, 개인주의 시대, 신자유주의 시대라고 하는데, 인간이 파편화되고 원자화된 이 시대에 과연 시가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을까, 시대에 대응할 수 있을까 많은 고민들을 하는데, 그럼에도 시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어려운 시대일수록 꿈을 잃지 않아야 하기 때문인데, 이는 판도라의 상자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단 하나의 요소가 희망이라는 사실에서, 시는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하고,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처럼 우리가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지 못하면 삶이 공허해지고 말텐데, 이런 의미를 찾는 노력을 시가 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디에서 의미를 찾을까 하는 생각을 지니고 있는데...
시집을 읽으면 그래도 대표시가 제목이겠거니 하는 생각을 하고 그 시를 더욱 더 주목해서 보게 되는데, 이게 웬일인가 제목이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이다. 세계 대전은 달랑 두 번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백 년 동안이라니, 무슨 서양의 백년 전쟁도 아니고, 그래서 이 시를 읽는데, 아니 시집 자체가 폭력, 전쟁, 공포를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아도, 이런 내용이 도처에서 넘쳐나고 있는데, 결국 이 시집의 제목에 나와 있는 시처럼 우리는 백년 동안 전쟁을 치르고 있는지도 모르고, 누구 말대로 전쟁의 목적이 바로 평화라는 역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핵무기를 개발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전쟁을 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탄압을 하는 이 역설이 바로 이 시에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사람이 나온다. 이 시에는 얌전한 사람, 순한 사람, 현명한 사람, 정확한 사람, 배운 사람, 인내심 강한 사람, 멋진 사람, 유머러스한 사람들이 순서대로 나온다. 이들을 이렇게 명명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이들은 어떤 행위로 이렇게 명명되었다. 이들이 명명된 사실은 사회에서 어떤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지 않나.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사람을 떠나서 우선 사람이다. '불침번처럼 불면증에 시달리는 당신은 사람이다. 명령을 기다리며 전쟁의 뒤를 두려워하는 당신은 사람이었다. 백 년이 지나 당신의 평화는 인간적으로, 계속될 것이다. 당신이 사람이라면.'이라고 한다. 우린 사람이다. 그리고 사람이어야 한다. 이 사람이라는 사실에 우리의 동일성이 있고, 이 사실이 다양성 속에서도 동일성을 확보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이라는 동일성에 기반해 다양성을 인정하고 함께 살아갈 수 있다. 아니 함께 살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은 지속된다. 앞으로도 죽. 이 전쟁이 단지 물리적인 전쟁만은 아니다. 그것에 대한 이야기들이 이 시집 2부와 3부에 나와 있다. 2부와 3부의 제목만 보면 "아주 도덕적인 자의 5분"과 "핍진성"이다. 아주 도덕적인 자라는 말에서 아주란 말이 부정적으로 쓰이고 있다. 이러한 도덕이 우리를 얼마나 길들이는지, 우리를 다른 존재와 구별되는 존재로 강제하는지 알려주고 있고, 핍진성이라는 말은 진짜는 아니되 진짜와 같음을 의미한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진실이 아니다. 진실을 위장하고 있을 뿐이다. 이를 핍진성이라는 말로 나타내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세상 속에서 감추진 진실을 찾는 노력을 해야 한다. 시인은 시에서 핍진성이라는 단어로 우리가 가짜 진실에 속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적이다는 아도르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아우슈비츠를 겪고도 시를 쓰지 못한다는 것은 더욱 야만적이다. 시인은 시를 써야 한다. 시 속에서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야 한다. 사람들은 시를 읽어야 한다.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세상의 어두운 모습을 표현해내는 시를 읽어야만 한다. 그래야 우리는 얌전한, 순한, 멋진, 배운, 인내심 강한, 유머스러한 사람이 아니라, 바로 사람이 된다. 우리는 사람으로서 사람을 만나야 한다. 그 만남을 바로 시가 주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