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신동문 평전 - 시대와의 대결
김판수 지음 / 북스코프(아카넷) / 2011년 4월
평점 :
품절


신동문 하면 4.19를 노래한 시밖에는 생각나지 않았다. 이 사람이 언제부터 활동했는지, 시적 경향은 어떠했는지, 그리고 시집을 몇 권이나 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만큼 알려지지 않은, 잊혀진 시인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염무웅의 평론집을 읽다가 신동문을 다룬 글을 읽고,어, 이 사람, 그리 만만하게 봐서는 안되네, 그냥 잊혀져선 안 되는 시인이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항시인, 참여시인 하는데, 60년대 하면 주로 김수영, 신동엽만 이야기 하지 신동문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이 나라에서 평균보다는 높은 학력에, 평균보다는 많이 시들을 읽고 있고, 시집도 평균보다는 많이 소장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도, 신동문은 그냥 4.19를 노래한 시를 하나 쓴 시인정도로만 기억하고 있었으니.. 참.. 

하긴 시인이 꼭 시를 많이 써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함형수는 '해바라기 비명'으로 우리 시단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신동문도 '아, 신화(神話)같이 다비데군(群)들' 이란 이 시 하나로 문단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지 않은가. 아니 이미 이 시 하나로 60년대 대표적인 참여시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신동문이 이 시 하나만을 발표한 것도 아니고, 다른 시도 있고, 비록 시집은 한 권만 내고는  끝이었고, 나중에 전집으로 묶인 시집도 한 권밖에 되지 않지만, 당시에는 상당히 각광받는 시인이었다는데, 아쉬움이 남았다. 이게 이 평전을 읽게 된 이유인데... 

읽어가면서... 신동문의 생애와 겹쳐, 머리에 박봉우의 '창(窓)이 없는 집'이란 시가 자꾸 떠올랐다. 

어쩌자는 건가 / 괴로운 시대에 / 시인은 무엇을 하는 것인가 / 어둠이 깔리는 / 

대지에 서서 / 별들에게 / 고향을 심는 것인가 / 어쩌자는 건가 / 어둠이 쌓이는 / 

무덤가에 서서 / 시인은 무엇을 노래할 것인가 / 구름이 흘러가는 심중(心中)에 /  

그래도 저항할 것인가 / 자유지대에서 / 괴로우며 / 시인의 혁명은 / 싹트는 건가/ 

창이 없는 하늘에 / 남겨 둔 꽃씨를 뿌리는 건가. - 박봉우, 창이 없는 집, 전문 

신동문의 삶이 바로 이 시에 나온 시인의 삶이 아니던가.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세상에 나름대로 씨앗을 하나 뿌려두는 삶의 태도. 그는 그래서 독재가 판치던 6,70년대 저항시인이라는 말을 듣게 되는 것 아닌가. 시는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름을 건호에서 동문이라는 필명으로 바꾼 일화도 새길만하다. 동문이란 병원에서 중환자들이 죽음에 이르러 실려나갈 때 쓰던 문이란다. 서울로 말하면 시구문일텐데, 결핵을 앓으며 언제 죽을지모르는 그는 죽음과 늘 대면하면서, 자신의 이름에도 죽음의 문인 동문(東門)을 쓰고 있으니, 그가 현실에서 벗어난 시를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작활동은 그리 활발하지 않았다. 편집자로서, 발행인으로서, 그리고 산문을 쓰는 문필가로서 활동을 더  많이 하고 어느 순간 그는 어떤 글도 쓰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충청도 단양 땅으로 가 거기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농민으로서, 침술가로서 살아간다. 

이렇듯 그의 삶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젊은시절, 시인으로서의 신동문이라면, 중년시절이후는 농민, 침술가로서의 신동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시인으로서의 삶을 끝냈다고 보기보다는 시인으로서의 삶을 활자로서의 활동에서 온몸으로 하는 활동으로 전이했다고 봐야한다고 평전의 저자는 이야기 하고 있다.  

"시를 지으려면 마음이 들뜨거나 흥분할 수밖에 없어. 얼음같이 냉정하고 차분한 태도로 어찌 좋은 시를 내놓을 수 있겠나. 침술은 그렇지 않아. 냉정하고 차분한 마음으로 제 시각에 제 자리에 정확하게 침을 꽂아야 해. 그것이 곧 정곡 찌르기야."(316쪽)라고 하듯이 젊은시절 열정이 넘치던 때는 시로 세상을 대하고, 나이가 들어 열정을 다스릴 수 있을 때는 침으로 세상을 대했다고 보아야 한다.  

이 대목에서 그가 저항시인 소리를 들을 때 참여문학 대 순수문학 논쟁이 벌어질 때 비판했던, 서정주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났다. 신동문 시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신동문의 이 말은 서정주의 국화옆에서 중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이 구절을 생각나게 했다. 그는 이제 젊음의 뒤안길에서 돌아와 침술이라는 거울 앞에 앉아 자신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영위해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그의 침술은 일찍이 시로써 현실에 참여하고 독재에 저항했던 일에 못지 않은 존재감이었다"고 저자가 말하고 있듯이 그는 평생을 시인으로서 살아갔다고 말할 수 있다.  

자, 그가 한 일을 정리해 보자. 그는 시인으로서 시를 썼고, 문필가로서 여러 사회문제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썼으며,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서 많은 좋은 책(특히 전집류 중에서 우리 문학계를 풍성하게 했던 좋은 전집이 처음에 그의 손을 거쳐 나왔다고 한다)을 냈고, 좋은 시인(신경림 등), 소설가(이병주 등)를 발굴해 내었으며, 농민으로서 농촌공동체를 만들려는 노력을 해서, 양잠업, 과수원 경영, 그리고 젖소 사육까지 수양개 마을이 충주댐으로 인해 수몰되기 전까지 수양개 마을 사람들과 한 마음, 한 몸으로 잘 지냈다. 

국가권력의 횡포로 마을이 수몰되고, 마을 사람들이 하나하나 떠나가 공동체가 파괴되었을 때, 그의 몸도 파괴되기 시작하여, 용하다고 소문난 자신의 침술로도 자신의 몸을 고치지 못해, 담도암으로 93년에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남으로써, 이미 70년대 후반부터 잊혀지기 시작한 시인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문단사에서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다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그를 추억하기 위해 시비를 건립하고, 아직도 수양개 마을 사람들의 기억에 살아 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따라서 이 책은 한 때 우리 문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신동문 시인을 복원한다는 의의가 있다. 그리고 그의 삶, 그의 성품,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까지 많은 것을 전해주고 있다. 온몸으로, 자신의 삶 자체가 시였던 신동문, 그가 다시 우리 문학사에 복원이 되는 순간, 우리 문학사는 좀더 풍요로운 문학사가 되지 않을까....


댓글(1)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삿갓 2011-06-12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신동문 시인은 언젠가 제게 이런 말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저 시가 왜 공공장소마다 걸려 있는 거야? 당신, 저 시에 속아서는 안 돼! 먼 나라의 시인이 남의 나라에 와서, 남의 나라 사람들의 삶을 걱정해준다는 것이 도대체 말이나 돼!>
1980년대 후반 어느 날 식당에서였습니다. 러시아 시인 푸쉬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가 액자로 만들어져 걸려 있었는데, 이 시를 가리키며, 못마땅하다는 투로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참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좋은 날이 있으리니...> 어쩌구저쩌구 하는 싯구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나 봅니다. 당시 이 시는 식당 뿐 아니라 버스터미널, 기차역, 이발소 등 공공장소에 널리 걸려 있었지요. 신동문 시인의 지론은 <삶에 속았다고 생각되면 슬퍼하거나 노하라>는 쪽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는 언제부턴가 갑자기 사라져, 지금은 공공장소에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 당시 저희 세대는 김소월의 <진달래꽃>만큼이나 이 시를 즐겨 외우곤 했습니다.
하긴, 그 번역 시가 이 땅에서 널리 유행했다가 갑자기 썰물처럼 사라진 연유를 저는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