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재밌다. '지구가 죽으면'이라는 말에서 지구를 가이아라고 생명체로 보는 관점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런 지구가 죽으면 지구를 돌고 있는 달은 누굴 돌지?라고 의문을 제기하는 질문.
여기서 달이 도는 것은 또 다른 행성이 아니라 사람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누구'로 나온다. 그러니 지구와 달이 모두 사람과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이 지구와 달을 사람으로 비유하고 있다면, 이를 부모자식 사이로 치환을 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든다.
지구가 부모고, 달이 자식이라면 부모가 죽으면 자식은 어떻게 살지? 라는 의문문으로 바꿔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지구와 달의 관계를 보면 지구가 사라지면 달도 사라지겠지... 지구가 사라진다는 것은 폭발한다는 말이고, 이 폭발은 달에게도 영향을 미칠 테니까. 그럼에도 우연히, 또는 운 좋게도 달이 살아남는다면 달은 어떻게 될까?
부모가 죽으면 자식은 어떻게 될까? 일반적으로는 자식들이 성장해서 자기 삶을 살아갈 때 부모가 세상을 뜨니, 자식의 삶에 슬픔을 주긴 하겠지만, 삶을 파괴할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 부모가 자식이 독립하기 전에 죽으면? 그때 자식들의 삶은 어떨까? 고통스럽고 힘들 것이다. 힘들겠지. 당연히 부모를 의지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 의지처가 사라졌다고 한다면...
부모 역할을 해줄 또 다른 어른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 어른 역할을 사람이 할 수도 있지만 사회가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 사회가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허면 시인의 질문을 바꿔본다. 지구가 죽으면 달은 지구와 같은(? 완전히 똑같을 수는 없지만, 비슷한 역할은 할 수 있을 테니) 다른 존재를 찾아 돌면 된다.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이지 않은 말이겠지만 시를 통해 과학의 원리를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니...
지구가 죽으면 달은 다른 누구를 찾으면 되지로 바꾸면 좋지 않을까 하는데... 시집을 읽어보면 온통 죽음 뿐이다. 죽음, 죽음, 그것도 엄마의 죽음이다.
시집 처음에 '그리고 곧 엄마도 죽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10쪽)라는 구절이 있다. 엄마의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뒤에 오는 문장 '언제나 어떤 죽은 생명체가 나를 감싸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10쪽)는 말.
그렇게 죽음은 이 시집 전체를 감싸고 있다. 그러다 3부로 가면 죽음은 '모래'로 바뀐다. 이번엔 온통 모래, 모래다. 모래와 죽음이라니...
'모래의 머리카락'이라는 시에 '시인은 왜 부재의 집을 짓고, 부재와의 사랑을 하고 싶은지, 시인은 어째서 존재 속에서 부재를 펼치고 싶은지,'(231쪽)라는 구절이 있다.
'부재(不在)', 있지 않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있지 않다는 것이 내가 알지 못한다는 것이지 실제로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시인은 부재의 집을 짓는다고 했는데, 이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 시인은 다르게 보는 사람.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 시집에 나오는 죽음은 부재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죽음은 부재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 이후를 모른다. 도대체 죽음 이후는 어떻게 되는가? 누군가는 죽음을 깨지 않는 잠이라고 하지만, 또 죽음을 먼 길을 가는 여정이라고 하지만 모른다.
모르기에 부재의 대표다. 그런데 모래는? 실재한다. 우리 눈에 보인다. 왜 모래가 죽음과 연결이 되지? 하는 생각.
그러다 모래는 버리고 버리고 이제 버릴 것이 없는 상태로 남은 알갱이라고 한다면, 모래알처럼 흩어진다는 말, 한때 모래를 뭉쳐주던 존재가 사라지면 모래는 낱낱으로 존재할 뿐이니... 삶이 끝나고 죽음이 시작되면 사람은 모래처럼 홀로일 수밖에 없다.
또한 사람은 물로 삶을 지탱해 왔는데, 물이 다 나가고만 상태가 죽음이라면 물이 도무지 들어갈 수 없는 모래 역시 죽음과 같다고 여길 수 있지 않을까.
그간 지녀왔던 관계를 모두 끊고, 또는 잃고 자신이 지닐 가장 최소한의 것, 더는 잃을 것이 없는 것 (죽음 이후에도 그런 것이 과연 있는지는 모르지만)만을 지니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죽음 아닐까.
관계를 잃은 존재, 개별로 존재하는 존재, 소중한 사람의 죽음으로 자신의 상태를 이렇게 알갱이로만 남겨진 존재로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하지만 모래는 홀로이지만 함께이기도 하다. 그것이 바로 우리 사회 속 인간들 모습 아닌가. 무언가 모래들을 뭉쳐줄 존재가 있다면 모래들은 관계 속에서 물을 받아들인다. 받아들여 낱낱이 아닌 무언가로 존재하게 된다.
그런 것이 바로 삶 아닐까. 우리는 어쩌면 죽음이라는 것을 통해서 삶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래는 그 자체보다는 다른 존재와 뭉쳐서 무언가로 변하게 되니, 그것 역시 죽음과 삶의 관계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게 한 이 시집.
솔직히 어렵다. 부재, 이해의 부재, 공감의 부재. 그런데 무언가가 희미하게 나를 감싸고 있는 듯한, 이해의 부재 속에 있는 이 시집. 이해하지 못한다고 읽지 못한다는 말은 아니니...이해의 부재 속에서도 이상하게도 읽히는 시집이었으니...
제목을 빌려온다. 시를 이해 못하면 왜 읽지? 라는 질문보다는 시를 꼭 이해하면서 읽어야 하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