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이해하기 힘들다. 피아노로 가는 눈밭이라니... 그렇다면 피아노까지 가기 위해서는 눈밭을 거쳐야 한다는 말인가?
그런 눈밭은 뭔가? 눈이 쌓인 밭. 겨울이다. 겨울? 무언가 뼈대만 남은 날들 아닌가. 가을을 수확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잎과 열매들이 곧 떨어질 것을 예비하고 있는 때 아닌가.
하지만 단지 겨울이라고 황량함만을 생각하면 안 된다. 한 편의 풍경화를 떠올려보자. 눈이 하얗게 쌓인 밭. 어떠한 발자국도 없는, 아니 누군가 새벽에 하얀 눈밭을 가로질러 간 발자국만 선명하게 남아 있는 그러한 눈밭.
황량함보다는 깨끗함이라든지, 신선함이라든지, 나도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풍경이 아닐까. 그러한 눈밭을 거쳐 피아노에게 간다?
피아노? 단순하게 생각한다. 음악이다. 그럼 눈밭은 말이다. 즉 시인에게 말은 음악이다. '문장에는 음성 곡선이 존재한다'('말' 중에서. 86쪽)는 표현도 있으니, 시인에게 시는 말이고, 말은 음악이다. 그러니 말을 거쳐 음악으로 갈 수 있다. 아니, 이미 말과 음악은 하나다. 그러니 '피아노에도 눈밭이 있'(24쪽)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말... 눈밭이 말이라면 더 나아가야 한다.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순간으로 남는다. 눈밭의 풍경은 마음 속에 영원히 남을 수 있지만, 실제 눈밭은 오래 남아 있지 않는다.
시인이 '눈을 나르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 1-4'라는 시에서 하고 있는 말이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말은 사라진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다른 사람의 마음에 영원히 담겨 있다.
하여 시인은 말에는 바구니가 있다고 한다. 이 바구니, 말로 채워지기도 하지만 비워지기도 한다. '호모 바구니'라는 시를 보면 알 수 있다.
호모 바구니
말에는 바구니가 있다 어휘를 담는다 어떤 어휘는 날아와 담긴다 바구니 없는 곳에 온 어휘를 위해 바구니가 생기기도 한다. 어휘가 떠나면 바구니도 사라진다 바구니는 투명해서 보이지 않는다
말의 바구니는 누구나 갖고 있다 바구니에서 바구니로 날아다니는 어휘도 있다 어휘가 날아가면 바구니에는 흔적이 남는다 말을 하지 않을 때 바구니는 비어 있다
바구니는 인간에게서 인간으로 유전된다 한다 늑대인간도 바구니가 있다 호모사피엔스는 바구니로 인해 살아남았다 너도 나도 바구니로 인해 존재하고 있다 호모사피엔스는 호모 바구니이다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는 호모 바구니이다
임선기. 피아노로 가는 눈밭. 창비. 2021년. 91쪽
이 시를 보면 말은 눈이고, 바구니는 눈밭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를 존재하게 했던 것들이 바로 피아노, 즉 말과 말이 어우러져 하나의 조화를 이루는 것. 음악. 그렇게 인류가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말들과 말들을 담아두는 바구니가 있었던 것. 우리를 다른 곳으로 인도해주는 눈밭이 있었던 것.
다른 시를 보니 결국 말은 우리를 다른 세상으로 데려다주는 존재였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호모 바구니'라는 시와 연결할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풍경 2
차안과 피안 사이에서
강은 바다로 가고 있다
임선기. 피아노로 가는 눈밭. 창비. 2021년. 77쪽.
하아, 이 강이 바로 언어로 이룬 문명 아니겠는가. 결국 말이 우리를 다른 세상으로 이끌어주었으니, 이렇게 중요한 말을 과연 우리는 제대로 쓰고 있을까?
말의 바구니가 보이지 않는다고 그냥 막 쓰고 있지는 않은지... 다른 사람이 모를 것이라 생각하고, 아니 알아도 상관없다고, 어차피 보이지 않으니 내 맘대로 뱉고 말겠다고...
그러면 눈밭에 찍한 선명한 발자국이 아니라 걷잡을 수없이 녹아버린 눈밭. 그곳에 남아 있는 결코 보고 싶지 않은 풍경만 남을지도 모른다.
하여 말에는 기술이 필요하다. 말의 바구니에 제대로 담을 수 있는 기술. 시인은 그것을 '예술'이라고 했지만, 말 자체가 음악이면, 곧 예술이다. 즉 말은 예술이어야 한다. 그만큼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해줄 수 있는 존재. 그렇게 하기 위해선 제대로 써야 하겠지만.
예술
물을 많이 주었더니
뿌리가 썩었다
해를 많이 주었더니
잎들이 탔다
기르는 것은 임이고
사랑은 임을 기르는 것인데
기르는 데는 방식이 있어서
방식을 배워야 한다
사랑의 방식은
사랑의 기술
사랑의 기술은
혁명의 기술
복사씨와 살구씨의 기술...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야 하는 기술......
임선기. 피아노로 가는 눈밭. 창비. 2021년. 51쪽.
말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적어도 바구니에 제대로 담기 위해서는. 그런 말의 기술이 필요함을 더더욱 느끼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