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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소녀들의 숲
허주은 지음, 유혜인 옮김 / 미디어창비 / 2022년 12월
평점 :
시대적 배경은 조선시대. 아직 명나라에 여인들을 공녀로 바치던 시대. 공간적 배경은 제주도. 조선이라는 나라에서도 외딴 곳으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던 곳.
제주도에서 열세 명의 소녀들이 사라진다. 그리고 그 실종사건을 수사하던 민 종사관도 실종이 된다. 실종된 아버지를 찾아 제주도에 오는 민환이로부터 사건은 시작된다. 환이에게는 제주도에는 남겨두었던 동생 민매월이 있다.
도대체 왜 소녀들이 사라진 것일까? 누가 사건의 주범인가? 누가 환이와 매월을 도와줄 수 있는가? 두 자매를 중심으로 유선비라는 술주정뱅이와 문촌장과 죄인 백씨, 그리고 매월을 키워주고 있는 노경 심방. 촌장의 딸과 죄인 백씨의 딸. 환이의 고모, 제주 목사가 등장한다.
처음부터 환이는 난관에 봉착한다. 도대체 누가 범인이란 말인가? 단서는 없다. 그러다 하나하나 단서를 찾고 문제를 풀어가게 된다. 결국 범인을 찾아내고 사건을 해결하는데... 이 과정에서 조선이, 그 전 나라였던 고려가 겪었던 여인을 공녀로 바쳐야만 했던 역사적 비극이 나타난다.
이런 비극을 힘을 모아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제주 목사는 실종이 아닌 가출로 판단하고 수사를 하지 않고, 촌장 역시 손을 놓고 있는 상태.
이것은 '나만 아니면 돼'라는 태도이고, 이런 태도는 오히려 지배층에서 더 잘 나타난다. 자신의 딸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의 딸을 대신 보내려는 사람들. 사건의 중간 쯤 가면 사라진 소녀들은 누군가의 딸을 대신해서 끌려갔음을 짐작하게 된다. 힘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딸을 지키기 위해서 저지른 일.
힘없는 사람들은 이렇게 하지 못한다. 단지 힘있는 자들만이 이런 일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내륙이 아닌 제주도에서 소녀들을 구한다. 왜냐하면 지배층들이 자신의 딸을 대신하여 공녀로 보내려는 소녀를 내륙에서 구한다면 이는 사건이 공론화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은 제주도에서 소녀들을 구해 대신 보내려 한다.
제주도. 내륙에 비해 차별을 받는 곳. 여기에 제주도 여인들은 더한 차별을 받으니, 이중 차별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하층민들의 삶은 더더욱 그렇다. 비밀을 밝히려는 소녀들은 죽음에 이르고, 이를 지배층들은 무마하기만 하고.
돈과 권력과 개인의 이익이 결탁했을 때 피해를 보는 사람은 하층민들이다. 이 하층민들은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다. 슬퍼하고 슬퍼하고, 좌절하기만 할 뿐.
그러다 환이가 등장한다. 아버지를 찾는 과정에서 문제를 알아가는 환이. 나라가 겪는 비극을, 힘없는 나라에서는 여인들이 더욱 수난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환이를 통해서 작가는 잘 보여주고 있다.
아름답게 태어났다는 사실이 죄가 될 수 있는 나라. 자신의 의지보다는 부모의 의지에 휘둘려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여인들. 환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로지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려야 한다는 생각으로만 살아왔던 환이.
환이의 세상은 아버지의 세상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실종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환이는 자기 세상을 만나기 시작한다. 자신과 비슷한 여인들이 겪는 어려움도 알게 되고.
약한 자신을 의식하고 두려움에 떨기도 하지만 옳음을 포기하지 않는다. 옳음을 포기하지 않는 길이 자신과 동생 매월이를 지키는 길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고.
범인은 결국 지배층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제주도에서 지배층이라고 해야 내륙에서는 보잘것없는 직위겠지만, 그럼에도 제주도에서는 나름 돈과 권력을 쥐고 있다. 물론 제주 목사로 내려온 사람처럼 자포자기하는 관료도 있지만, 토착민으로서 촌장의 지위에 오른 자는 강한 권력을 쥐고 있을 수밖에 없다.
많은 우여곡절을 겪지만 결국 환이는 문제를 해결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사라진 소녀들을 찾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찾는 과정이기도 하다. 아버지에게서 벗어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수사 일지를 바탕으로 자신의 일지를 써나가는 환이. 그런 환이를 도와주는 매월. 두 자매가 갈등하며 서로를 알아가고 의지해가는 과정을 통해 이들은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된다.
주체적인 여성으로 서게 되는 환이의 이야기라고 해도 좋은데, 그 과정에서 공녀라는 역사적 비극을 생각하게 되고, 그러한 비극 앞에서도 계층에 따라 비극의 강도가 달라지고 있음을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작가가 캐나다에 살고 있다고 하는데, 영어로 쓰인 소설을 번역했다고 하지만 번역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작가에 대한 소개가 없이 또 책 표지에 옮긴이를 밝히지 않았다면 그냥 한국에서 한국어로 출판한 소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정도로 매끄럽게 진행된다.
때때로 다른 길로 들어서는 환이의 모습에 안타까워 하기도 하고, 단서를 해석하면서 사건의 본질에 다가갈 때는 응원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여기에 같은 여성으로서 알게모르게 도와주는 다른 인물들을 통해, 약자들의 연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까지 긴박하게 전개되고 있으며, 사건 해결 후에는 환이가 어떤 삶을 살지, 주체로 서게 되는 환이의 모습이 후일담으로 나와 흐뭇한 마음으로 책을 덮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