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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속의 영원 - 저항하고 꿈꾸고 연결하는 발명품, 책의 모험
이레네 바예호 지음, 이경민 옮김 / 반비 / 2023년 3월
평점 :
책은 생물이 아니다. 그러나 생물처럼 존재한다. 아니 책은 생물이다. 살아 있다. 책을 죽은 존재로 취급하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또한 책을 죽이려는 사회 역시 생명을 오래 유지하지는 못했다. 책은 없애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생명력을 유지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이 책은 책의 역사이자 책에게 일어난 일들을 기록한 책이다. 책에 대한 책이라고 해야 할까? 알렉산더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세계를 정복할 꿈을 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무력으로.
하지만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한 사람은 없다. 어느 순간 한계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은 세계를 정복할 수가 있다. 책에게는 한계가 없다. 시간의 한계도 공간의 한계도 언어의 한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알렉산더는 세계 정복의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는 세계화에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 헬레니즘이라는 이름이 지금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도 알렉산더 덕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책에 관한 알렉산더의 기여다. 그는 전쟁 중에도 '일리아스'를 들고 다니면서 읽었다고 한다. 자신을 아킬레우스에 비유하면서.
단지 알렉산더가 책을 읽었다는 것에서 그의 공헌을 발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책에 대한 그의 공헌은 그가 죽은 뒤에 나왔다. 바로 그의 이름을 딴 도서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다.
각지에 흩어져 있던 책들, 다양한 언어로 쓰였던 책들을 한 곳에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단지 보관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필사를 하고 번역을 한다.
책을 통해 세계가 교류하기 시작한다. 국제화, 세계화가 자연스레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것을 방해하는 존재도 있다. 책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도서관을 파괴하기 시작한다.
자신들만이 존재해야 한다는 듯이. 하지만 도서관을 파괴해도 모든 책을 파괴할 순 없다. 또 책을 읽지 말란다고, 책을 불태우라고 해도 몇몇은 책을 구출한다. 그리고 그 책들은 후대로 전해진다.
즉, 지금 우리에게 남아 있는 책들은 그런 과정을 통해 왔다. 저자는 '멸종위기 책'이라는 말을 쓰기도 했는데, 역사를 통해서 책은 멸종위기에 처한 적이 많았다.
저자가 들고 있는 예를 들지 않아도 우리나라 [훈민정음]을 생각해 보면 된다. [훈민정음] 책이 발견되지 전에 한글 창제에 관해서 얼마나 많은 억설들이 있었던가. 분명 창제한 사람과 창제한 시기 그리고 출판을 했다는 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발견되지 않았다.
연산군 때 한글 사용을 금지했다고 한글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한글로 꾸준히 창작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훈민정음]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야말로 멸종위기 책이 바로 [훈민정음]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공식적으로는 단 두 권만이 살아남았다. 그나마 한 권은 어디에 있는지를 모른다. 단 한 권만이 간송미술관에 보관되어 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책의 모험이다. [훈민정음] 책은 바닥을 까는 재료로, 화장실의 휴지로, 벽지로 쓰이면서 사라져 갔을 것이다. 눈 밝은 누군가가 발견하고 보관하기까지는.
왕조실록을 무려 4곳에 보관하던 조선 사람들이 [훈민정음]을 이렇게 도외시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지만, 이 책을 읽으면 이는 [훈민정음]만의 문제가 아니다.
많은 책들이 이러한 과정을 거쳤다. 그러면서 살아남았다. 어떤 책은 '고전'이라는 이름으로 귀한 대접을 받으면서 살아남았고, 어떤 책은 간신히 살아남아서 훨씬 뒤에야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 책을 읽으면 이러한 책의 역사, 책의 모험을 만나게 된다. 과거와 현재의 많은 책들과 작가들이 종횡무진으로 나타난다. 책에 관한 수많은 지식들이 날줄과 씨줄로 엮여 있다. 시공간을 초월해서 책에 관한 이야기가 이 책을 이루고 있다.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저자가 이 책에서 하는 말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은 우리에게 시들지 않는 선례를 물려주었다. 인간의 평등, 지도자 선택의 가능성, 아이들에게 노동보다 교육이 낫다는 직감, 병자와 약자와 노인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지원 등, 이 모든 발명은 고대의 발견, 즉 불확실한 경로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 고전을 통해 가능했다. 책이 없었다면 우리 세계의 가장 좋은 것들은 망각 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507쪽)
그렇다. 지금은 e-북이라고 해서 디지털을 이용한 책들도 나오고 있지만, 책의 형태가 어떠했든 책은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존재였다. 무생물이 아니라 생물로 우리 곁에 책이 존재하고 있음을 이 책을 읽으면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