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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이는 물결 - 작가, 독자, 상상력에 대하여
어슐러 K. 르 귄 지음, 김승욱 옮김 / 현대문학 / 2023년 2월
평점 :
르 귄이 쓴 에세이 선집이다. 많은 글들이 있다. 글 한편 한편을 읽으며 여러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만큼 글에 깊이가 있다. 깊이 내려가 글의 맛을 느낄 수 있다.
제목에 대해 생각에 본다. 마음에 이는 물결이라? 참 마음에 드는 제목이다. 글은 마음에 이는 물결이어야 한다. 마음을 일게 하지 않으면 좋은 글이 될 수 없다.
마음을 일게 한다는 마음을 울린다로 바꿀 수 있다. 그렇다면 마음을 울리는 글은 내 마음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음까지도 울리는 글이고, 그런 글들이 마음과 마음을 울림으로 연결시켜준다. 좋은 글이다.
마음을 울린다는 면에서 보면 르 귄이 쓴 소설도 좋지만, 에세이도 좋다. 여러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그 중에 이 책의 제목과 연결되는 글들이 후반부에 나온다. 아니, 후반부뿐만이 아니라 도처에서 나온다. 그것이 르 귄이 글을 쓰는 방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제목이 된 말은 버지니아 울프에게서 따왔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몇몇 작가의 작품을 꼭 읽어야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중에는 이미 읽은 책도 있지만, 다시 읽고 싶어진다. 또 뒤로 미뤄두었던 소설들을 찾아 읽고 싶어지기도 하고. 그만큼 르 귄이 쓴 이 책은 마음을 울린다. 다른 책들과 공명(共鳴)하게 한다.
우선 작가를 중심에 두면 작가가 어떻게 글을 쓰는가에서 [어린 왕자]에 나오는 여우가 말하는 '길들이기'를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이 길들이기가 무엇인가. 바로 기다림이다. 상대에게 곧장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천천히 스며드는 것. 그리고 책임지는 것.
울프는 이를 마음에 이는 물결이라고 했다고 한다. 마음에 이는 물결을 통해 단어가 나오고, 그 단어들을 통해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서둘러서는 안된다. 또 다른 '길들이기'다. 르 귄의 말을 인용한다.
'기억과 경험 아래에, 상상과 창조 아래에, 울프의 말처럼 단어 아래에 리듬이 있고, 기억과 상상력과 단어는 모두 그 리듬에 맞춰 움직인다. 작가가 할 일은 그 리듬이 느껴질 만큼 깊이 내려가서 리듬을 찾아 거기에 맞춰 움직이는 것이다. 그 리듬이 기억과 상상력을 움직여 단어를 찾아내게 가만히 가두는 것이다. ...울프는 그것을 마음에 이는 물결이라고 부른다.' (462쪽)
'울프의 이미지는.... 그녀가 생각한 물결은 파도다. 조용하고 매끄럽게 바다 위를 1천 킬로미터 넘게 가로질러 와서 해안에 철썩 부서지는 파도. 파도가 부서져 날아오르면서 단어라는 거품이 된다. 그러니 그 파도, 일정한 박자의 충격은 단어 이전에 존재하며, "단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따라서 작가가 할 일은 그 파도를 알아보는 것이다. 저 멀리 바다에서, 마음이라는 대양 저편에서 조용히 부풀어 오르는 파도를 알아보고 해안까지 따라오는 것이다. 해안에서 파도는 단어를 변화시키거나 스스로 단어가 되어 품고 있던 이야기를 내려놓고, 자신의 이미지를 토해내고, 비밀을 쏟아낼 수 있다. 그러고는 이야기의 대양으로 스르르 다시 물러간다.' (462-463쪽)
산문과 시, 모든 예술, 음악, 춤은 우리 몸, 우리 존재, 이 세상의 몸과 존재가 지닌 심오한 리듬에서 솟아나 그 리듬과 함께 움직인다. 물리학자가 읽는 우주는 아주 다양한 진폭의 진동, 리듬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술은 그 리듬을 따라가며 표현한다. 일단 올바른 박자를 찾기만 하면, 우리의 아이디어와 단어가 그 리듬에 맞춰 춤춘다. 누구나 합류해서 춤출 수 있는 윤무(輪舞)다. 그러면 나는 당신이 되고 장벽이 내려간다. 잠시 동안.' (463-464쪽)
인용한 글들, 참 아름답다. 작품이 이렇게 탄생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지 않을 수 없다. 서로 마음을 열고 함께 춤출 수 있다.
이런 글들은 편견에 머물지 않는다. 편견을 깨는 역할을 한다. 작가는 그래서 자신의 편견을 강화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의 편견도 깨지만, 다른 사람의 편견을 깨는 역할도 한다. 그것이 바로 작가다.
그렇게 편견을 깨기 위해서는 기다림, 적절한 단어가 떠오를 때까지 기다리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많은 작품이 언급되지만, 꼭 읽어야지 하는 마음이 들게 하는 작품들을 마음 속에 담게 한다. 그 작품들은 마음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 마음껏 읽고 함께 춤출 때까지는.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들, 톨킨의 [반지의 제왕]. 그리고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핀의 모험], 세상에 내가 아는 허클베리핀의 모험이 그런 소설이었어? 다시 읽어봐야겠네 라는 생각이 들게 한 이 에세이집이다.('작가와 등장인물',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가설들' 387-410쪽)
무엇보다도 이 에세이집은 르 귄의 소설을 읽을 때 도움이 된다. 물론 이 책에서 르 귄은 자신의 경험과 소설은 큰 상관관계가 없다고 하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많은 도움이 된다.
르 귄이 말했듯이 독자 역시 이 글을 읽으면서 글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고 또 르 귄 소설을 읽을 때 이 글들을 떠올리는 것은 독자의 몫이니... 작가도 이해할 것이다. 왜 자신의 소설을 읽는데 이 글들이 도움이 된다고 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