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해의 마지막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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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가지고는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는 소설이다. '일곱 해의 마지막'이라니... 그런데 책을 넘기면 처음에 시인 백석에 대한 소개가 나온다. [문장] 1940년 1월호에 발표된 백석 소개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한 장을 넘기면 소설이 시작하는 '1957년과 1958년 사이'라는 제목이 나오고, 그 밑에 한 편의 시가 인용되어 있다.


  백석이 쓴 시란다. 일부분이다. 그런데 처음 듣는 제목이다. 아마도 나중에 발간된 전집에는 수록이 되었겠지만, 내가 갖고 있는 백석 전집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석탄이 하는 말'이란다. 


  '우리 빨갛게 타련다 / 일곱 해의 첫해에도 / 일곱 해의 마지막 해에도'(9쪽)


 이 시에서 제목을 따왔다. 제목에 대한 뜻은 잘 모르겠지만, 소설은 1957년부터 1959년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멀리 삼수로 발령이 난 백석. 그곳에서 노동을 해야 하는 백석. 그러나 소설은 백석이 좌절하면서 시와 멀어지고, 결국 시를 버리는 쪽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북쪽에서 백석은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생각하는 시와 그들이 생각하는 시가 달랐기 때문이다. 이런 장면을 작가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새로운 사회주의 공화국의 시들이 건설되고 있었다. 새로운 시들은 공장에서 미리 제작한 벽체를 올려 아파트를 건설하듯이 한정된 단어와 판에 박힌 표현만으로 쓰였다.'(162쪽)


시는 이래서는 안 된다. 특히 백석이 생각하는 시는 이것이 아니다. 그러니 그는 시를 쓸 수가 없다. 안 쓰는 것이 아니라 못 쓰는 것이다. 그가 쓰는 시는 그쪽에서는 시가 아니다. 개인의 푸념에 불과하다. 서정은 사치다. 아니 반동이다. 그러니 백석은 이제 시를 쓸 수가 없다. 


가장 개인적이고 자유로와야 할 예술가들조차도 하나의 틀에 갇힌 작품활동을 해야 하는 사회라면 그 사회에서 문학은 살아남을 수가 없다.


'수령이 문학에서 낡은 사상 잔재를 반대하는 투쟁에 나서라고 교시를 내린 뒤, 전국의 도서관과 도서실은 물론이거니와 개인이 소장중인 책들 가운데 반당 반혁명 작가의 책들을 회수해 공개적으로 불태우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거기서 불타는 한 권 한 권은 저마다 하나의 세계였다. 당연히 서로의 주장이 엇갈리고, 지향점은 다르고, 문체는 제각각이다. 그렇게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이고, 현실은 그 무수한 세계가 결합된 곳이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세계가 있고, 또 추악한 세계가 있다. 협잡이 판치는 세계가 있고, 단아하고 성실한 세계가 있다. 어떤 세계는 지옥에, 또 어떤 세계는 천국에 가깝다. 이 모든 세계가 모여 다채롭고도 영롱하게 반짝이는 빛을 발하면 그것이 바로 완전한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책 한 권이 불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인 한 명이 사라지는 게 아니다. 현실 전체가 몰락하는 것이다. ...언어와 문자는 언어와 문자 자신의 것이다. 그것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리얼리즘이란, 그런 언어와 문자가 스스로 실현되는 현실을 말한다.'(190-191쪽) 


이 표현을 보면 진시황의 분서갱유가 떠오르고, 나치의 퇴폐예술을 퇴치한답시고, 많은 예술작품을 태워버린 일이 떠오를 수 있다. 이런 일이 그 이후에도 일어나고 있었음을 김연수는 이렇게 백석을 통하여 직설적으로 비판한다. 문학은 자유로워야 한다. 어떤 형식으로든 문학은 간섭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니, 벗어날 수밖에 없다. 문학을 사상으로 옥죌수록 문학은 다른 언어들을 통하여 그 통제에서 벗어나려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리고 당대에는 힘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하는가? 아니다. 소설에서 백석이 결코 포기하지 않았음을 삼수에서 아이들의 시를 읽고 감상평을 써 주는 장면을 통해서 보여준다.


미래세대들이 쓴 시를 보면서 백석은 자신의 시를 미래세대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래야 한다. 아무리 통제가 거세더라도, 통제는 언젠가 풀린다.


소설의 끝부분에서 '천불'이라는 말을 통해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문학을 통제하려던 모습을 '지불'이라고 한다면, 그런 통제를 한순간에 뒤집어 엎는 것이 바로 '천불'이다. 


이 천불이 현재의 모든 것을 태워버리겠지만, 그 자리에서 다시 새로운 것이 태어난다. 그렇게 문학은 전복을 꿈꾼다.


문학을 묻어두려해도 문학은 천불을 통해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된다. 백석은 한때 남과 북에서 모두 잊힌 시인이었지만, 지금 적어도 남한에서는 시인들의 시인으로 불리고 있다. 그는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그의 시를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이렇게 백석은 '천불'을 통해서 다시 우리에게 왔다. 아니, 그는 우리들의 문학이 다시 불타오를 수 있는 숯이 되었다. 그는 그런 불쏘시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석탄이 하는 말'을 통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소설 끝부분에 나타난 '지불과 천불'을 작가가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보자.


'화전민들이 개간하기 위해 피우는 불이 땅속 뿌리로 타들어가는 지불이라면, 그래서 석 달 열흘씩 하얀 연기를 뿜어내는 보이지 않는 불이라면, 천불은 저절로 생겨나 순식간에 숲 전체를 활활 태우며 나무들을 서 있는 숲으로 만든다고 했다. 그 불을 보고 두메의 화전민들은 생을 향한 어떤 뜨거움을, 어떤 느꺼움을 느낀다고 했다. 불탄 그 자리에서 새로운 살길이 열리는 것이기에.' (238쪽)


이렇게 쓰고보니, 문학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이야기하는 소설같지만, 그렇지 않다. 백석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백석의 과거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북쪽의 생활까지를 소설 속에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김연수가 쓴 [굳빠이, 이상]과는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백석에 대해서 관심있는 사람, 이 소설을 읽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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