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된 시를 읽어도 무슨 뜻인지 잘 모른다. 밤의 분명한 사실들이라는데, 무엇이 밤의 분명한 사실일까?


  '염해 줘 / 제발 / 잠의 붕대로 / 하얗게 이 밤'으로 시작하는 이 시집 제목이 된 시 '밤의 분명한 사실들'


  '까만 밤 / 사막 / 휙 지나갔다 // 분명히 / 라고 누군가는 /또,'라는 구절로 끝난다. 


  밤은 지나간다. 분명한 사실은 밤은 왔다가 또 사라진다는 것. 시집 뒤 해설을 본다. 음유시인... 이 시집에서는 '소리'를 강조하고 있단다. 시는 눈이 아닌 입으로 읽어야 한다고.


  다른 사람에게 시를 읽어주는 사람. 얼핏 그럴 듯하다. 시집에 실린 시 중에 영어 표기를 발음기호로만 제목을 표기한 시도 있으니...


읽어라, 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런데 읽기 위해서는 언어가 읽기에 적합해야 한다. 낭송하기에 적합해야 한다. 물론 '봄의 히라프'라는 시는 읽기에 좋다. 읽으면서 가락도 느낄 수 있고.


하지만 이 시집 대부분의 시들은 시의 소리내기를 쓰고 있다지만 소리내어 읽기 힘든 시들이다. 먼저 눈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발음기호로 제목을 썼다고 하지만, 발음기호를 생각하기 전에 사람들은 발음기호를 눈으로 보고 의미를 생각한다. 


발음기호 역시 하나의 문자니, 문자를 눈으로 읽고 입으로 소리를 낸다. 소리를 낸 다음에야 비로소 의미가 머리 속에 들어온다. 아, 이 제목은 이것이구나 하게 된다.


그러니 낭송하기 좋은 시를 쓰려면 읽기에 편해야 한다. 남들이 모르는 언어를 써서는 안 된다. 영어 발음기호는 사실, 중고등교육을 배운 사람이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것 역시 착각.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도 발음기호만으로 되어 있으면 한참을 더듬거리게 된다. 여기서 소리가 중심인 시가 보자마자 입을 통해서 소리로 나오지 않고, 머리를 통해서 한창 궁리가 된 뒤에 소리가 된다.


읽기는 이만큼 다양한 과정이 있다. 한 과정으로 끝나지 않는다. 시인은 읽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시를 통해서 우리는 읽기의 어려움에 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밤을 생각한다. 어둠이다. 보이지 않는다. 시각이 작동을 멈추고 잠자리에 들 시간. 그러나 청각은 잠을 들지 않는다. 잠들더라도 시각보다는 한참 뒤에 잠든다. 밤은 시각보다는 청각이 활동하는 시간이다.


그러니 밤의 분명한 사실은 시각보다는 청각이 더 많이 작동한다는 사실. 이때 우리들은 온갖 소리들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는다는 사실 아닐까 한다.


이 시집에서 읽기에 관한 시 한 편 인용하고 끝맺고자 한다.


비인칭 독서


  읽어라. 무엇을?

  멀리 닭 한 마리, 형체 없는 새벽을 운다.


  읽어라. 누구를? 먼동이 트는구나

  텅 빈 페이지 한 장 바람도 없이 일어서고 있다.


  읽으오.

  읽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청각장애인이 하도 떠드는 통에 잠을 이룰 수가 없구나. 암사역에 하차하면

  점자도서관에 가까워지니?


  분쇄된 활자를 백지 위에 쏟아 놓습니다. 흑색의 마취 혹은 각성의 가루들. 외눈박이처럼 한쪽 콧구멍을 막으면 더 황홀해질까요. 10분 뒤 당신은 죽은 새가 놓은 두 갈래 자갈길에 서 있게 된다. 흙을 주세요. 가엾은 새들. 어느 방향을 택해도 황무지, 황무지, 황무지가 펼쳐질 터.


  이름 감춘 자의 머릿속을 저벅저벅 걸을 수 있다. 소리는 멋대로 커지고 또 작아진다. 작가는 아무것도 돼서는 안 돼. 그녀의 이야기에는 언제나 이름을 바꾼 자가 등장하지요. 그들은 글을 쓰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되지 않기 위해 아무거나 돼 버리기 위해 당신의 맷돌은 짜르락짜르락 바람 위에 한 톨의 모래를 얹고 있습니까. 


진수미, 밤의 분명한 사실들. 민음사. 2012년 1판 2쇄. 54-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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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2-08-25 1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인칭독서. 특이한 시네요. 좋은 페이퍼에 저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점자도서관에서 시각장애인들과 시 낭송 수업을 했어요. 그 생각이 납니다. 그분들은 사실 24시간 밤에 살지요. 청각이 예민해진다고 일반적으로 여기지만 그만큼 둔해지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항시 주어지는 시각이 오히려 무디어지듯이요. 시각장애인 중에 청력장애까지 겹치는 경우가 적지 않아요. 우리의 밤에 곤두서는 청각도 그런 의미로 무디어지진 않을지 경계해야겠네요. ^^ 읽는다는 것에 대하여, 보고 듣는 것에 대하여.

kinye91 2022-08-25 13:18   좋아요 1 | URL
프레이야 님 글을 읽고 청각장애인들도 청각이 둔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네요. 맞습니다. 항시 주어지는 것, 익숙해지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네요. 익숙함은 편안함과도 통하지만, 그만큼 예민성을 잃는다는 이야기도 되겠지요. 청각도, 시각도 무디어지지 않게 민감성을 지니면서 살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