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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사익 중장의 처형
야마모토 시치헤이 지음, 이진명 옮김 / 페이퍼로드 / 2017년 8월
평점 :
오래 전에 일본군 포로수용소 소장으로 전범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사형을 당한 조선인 장군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홍사익이라는 이름을.
이때는 그냥 친일을 한 사람, 그것도 일본 천황에 충성을 한 사람이라고 치부하고, 더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일제시대 일본군 중장까지 올라갈 정도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이어 일본 육군대학까지 나온 사람이니...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하지 못한 점이 있다. 왜 홍사익이지 하는 의문? 일본에서 중장까지 올라갈 정도의 사람이라면 창씨개명을 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왜 하지 않았을까?
저항시를 쓴 윤동주도 일본에 유학을 가기 위해서 창씨개명을 했는데, 왜 그는 일본 육군 중장이라는 장군이었는데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고,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도 그런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었는가 하는 생각.
무언가 이상하긴 한데... 그러다 이 책을 만났다. '홍사익 중장의 처형'이라니... 그를 처형하기까지의 과정이 잘 나타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읽기 시작.
앞부분에서 그가 우리나라 광복군을 이끈 이청천(지청천) 장군과도 관계가 있고, 독립운동을 하는 동기들의 가족을 뒤에서 도와주었다는 내용도 나오는데, 이는 우리나라 역사학계에서 연구하면 될 일이고...
일본군이든 광복군이든 아마도 동기라면 가족에 대한 도움을 거부하지는 못했으리라는, 그것이 인지상정이라는 생각. 그래도 민족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는 그리하지 않았을까라는 추측도 하지만, 이 책에는 그러한 증거로 '전의회(全誼會)' 회보를 들고 있는데, 이런 결정적인 증거가 있음에도 왜 그들은 그러한 사실을 알리지 않았을까.
해방된 조국에서 그런 사실을 밝히는 일이 구구절절 변명한다는 느낌, 그렇게 구차하게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지 않겠다는 지사적 자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는데...
개인으로서 하는 행동과 사회에서 위치한 자리에서 하는 행동이 똑같은 행동이라도 결과는 다를 수 있고, 평가도 다를 수 있으니, 이에 대해서는 더 고민을 할 필요가 있다.
다만, 이 책을 읽어보면 개인으로서의 홍사익은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일제시대 전쟁기에 과연 그는 어떤 행동을 했는가?
개인의 품성을 논외로 하고, 그는 포로수용소를 총괄하는 자리에 있었다. 물론 포로가 파견된 부대에 대해서는 지휘권이 없다고 이 책의 저자가 주장하지만 (전범 재판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가 포로수용소 총괄담당임은 틀림없다.
그에 대한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가 전범 재판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한 것은 어쩌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미 일본은 패망했고, 자신이 명령했든 명령하지 않았든 포로수용소에서는 잔학행위가 있었다. 그는 그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했을 수도 있다. 그러니 침묵으로 일관하고 사형 판결을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다만, 전범 재판에 대해서는 여러 방면으로 생각해 봐야 한다. 홍사익 중장은 억울한 면도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한 일본인들도 사형을 면하고, 나중에 일본 정계에 진출한 경우가 많은데, 그에게는 유독 가혹했던 이유는, 유럽에서 벌어진 포로에 대한 잔학 행위와 동남아 곳곳에서 벌어진 포로에 대한 학대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에게는 물어야 하고, 그 책임자가 바로 홍사익 중장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점에서 그는 자신의 책임을 받아들였을 수 있다.
'인간은 모든 선의를 갖고 사람을 대하더라도 그것이 죄를 저지르는 결과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죄를 범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경우가 있다.' (679쪽)
'홍 중장은 가능한 한 선의를 가지고 포로를 대했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으며, 그 면에서는 조금도 그의 양심에는 부끄러운 점이 없었다.' (680쪽)
이 구절에서 쿤데라 소설에 나오는 오이디푸스 이야기가 생각났다. 오이디푸스 역시 자신이 무슨 죄를 저지른지도 모르고 지냈다. 자신은 좋은 삶을 살았다고 믿으며 살았는데, 어느날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 알게 된다. 그것은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려고 한다.
홍사익 중장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한다. 그는 책임을 지려했고, 그 책임을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리고 우리 역사에서도.
그러나 저자는 일본식 사고, 또는 일본식 행동에 대해서 미군이 주축이 된 전범 재판소에서 그 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논리를 앞세운 그 재판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일본의 책임을 회피하는 한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일본도 잘못했지만, 미국도 잘못했다로 나아갈 수 있고, 그 주장의 한 가운데 홍사익 중장을 놓을 수가 있다. 잘못된 재판으로 희생된 사람으로.... 이렇게 보면 일본과 더불어 미국에도 비판을 가할 수가 있다.
전범 재판의 문제점을 이야기하기 전에 식민통치를 한 일본의 책임을 먼저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고, 자신들이 홍사익을 구하기 위해서 어떤 일도 하지 않았음도 인정해야 한다. 그가 조선인으로서 일본군 중장까지 갔고, 그 일로 인해 사형 선고를 받았다면, 그 일에 대한 우선 책임은 일본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홍사익의 행동이 합리화될 수는 없다. 그 역시 역사의 흐름을 알지 못했고, 또 일본군에 복무했다는 책임을 져야만 한다.
그래서 이 책은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갈 때 우리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의 행동에 찬성할 수 없지만, 그 역시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린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 수레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 아렌트 말대로 성찰해야 한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어디로 굴러가는지 알려고 해야 한다. 자신이 그 수레바퀴가 오는 길에 있는지, 그 수레바퀴를 미는 쪽에 있는지, 또 수레바퀴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성찰에는 공부가 필요하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도, 철학을 배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홍사익 중장의 처형을 읽으면서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린 한 사람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지금 우리 역사의 수레바퀴는 어느 쪽으로 가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