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난해하다. 이 시집은 아마도 평론가들에게 좋은 시집일테다. 평론가들이 먹고 살게 해줄 수 있는 시집일테니.
일반인들 가슴에 콕콕 와박히는 시들은 굳이 평론가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평론가들이 개입하면 시에 대한 감상을 망칠 수 있다.
마치 강요처럼 느껴질 수 있을테니. 그러니 일반 독자들이 쉽게 이해하고 그들의 마음에 와닿는 시들보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잘 알지 못하는, 어려운 문학이론들을 동원해서, 또는 사회학, 철학 이론들을 동원해서 설명할 수 있는 시. 얼마나 좋은가? 일자리 창출이다.
평론가들이 뿌듯하게 느낄 수도 있는 시다. 이렇게 말하면 평론가들이 기분 나빠하겠지만, 그들 역할이 무엇인가? 일반인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작품을,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 아닌가. 이 작품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라고 알려주는 역할.
그런 점에서 이 시집 뒤에 실린 신형철의 작품 해설은 제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해설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것은 읽는 사람 취향이겠지만.
'이미 있는 독자'와 소통하기보다는 '있어야 할 독자'를 창조하겠다고 나서는 시인들이 있습니다. 그런 야심가들을 흔히 전위(前衛)라고 부릅니다. (165쪽)
김언이 전위 시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난해하기는, 이해할 수 없는 시들이 쓰여 있으니 그렇게 판단해도 될 듯하다.
이 시집에 나온 한 구절...
전위는 새롭지만 선호하는 부위가 다르다 ('취향의 문제'에서 95쪽)
그렇지. 새로우니까 전위지. 하지만 선호하는 부위가 다르다는 말이 전위에 속한 사람들도 각자 자신의 취향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는 건지, 전위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다양하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나가 아닌 다양성. 단순성이 아닌 복잡성.
그래서 무언가를 더 생각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전위가 할 역할이고, 전위를 자처하는 시인은 시를 통해서 기존의 통념을 뒤집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왜냐하면 그가 사용하는 언어는 기존의 언어로 해석되기가 매우 힘드니까, 무언가 새로운 의미를 덧붙여야 하기 때문이다.
시인이 시 속에서 한 이 말처럼.
모든 언어는 은어니까 ('톰의 혼령들과 하품하는 친구들'에서 107쪽)
'은어'란 말은 말이되 기존의 뜻을 감추고 새로운 뜻을 만들어내는 말들. 아는 사람끼리만 아는, 남들이 다 알면 그 효용성이 떨어져 버리는, 더 이상 은어로 존재할 수 없는 언어 아닌가.
그러니 전위 시인이란 자신들의 은어를 사용하는 시인이고, 그 은어를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는 독자를 창조해내는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에게도 독자에게도 쉽지 않은 일일텐데.. 시가 은어라는 것을 넘어 모든 언어가 은어라고 하니, 언어 속에 숨어 있는 뜻, 그 뜻을 알아내고 빙그레 웃을 수 있는 독자. 행복한 독자다.
나는 아직 이런 은어의 세계에 익숙하지 못하다. 은유도 어려운데, 은어라니... 좀더 명확하게 말하고 소통하는 모습들이 넘쳐난다면, 시인이 모은 언어는 은어라고 말을 할 수 있을까.
하여 이 말에는 소통 불가의 우리 사회가 담겨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내가 쓰는 언어는 은어가 아닐까? 하는 반성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