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투의 스케치북
존 버거 글.그림, 김현우.진태원 옮김 / 열화당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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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의 책이다. 그가 직접 그린 스케치와 그것을 그리게 만든 일을 글로 적었다. 그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것은 자기 만족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우리에게 말을 건다. 말을 걸 뿐만 아니라 함께 가려고 한다.


우리 같은 드로잉을 하는 사람들은, 관찰된 무언가를 다른 이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계산할 수 없는 목적지에 이를 때까지 그것과 동행하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20쪽)


그렇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말을 걸기 위해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동행하기 위해서다. 비가 올 때 우산을 홀로 쓰는 사람이 아니라, 또 우산을 함께 쓰자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아줄 수 있는 사람, 비가 그칠 때까지 그 비를 맞으며 함께 견뎌주는 사람이 바로 존 버거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으면 아주 사소하다고 여기던 것들이 결코 사소하지 않음을, 우리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함을 생각하게 된다.


사소함에서 중요함을 보는 것, 그것은 바로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억압에 저항하는 일이고, 또 우리를 옭아매고 있던 보이지 않는 끈을 보게 되는 일이고, 머리 위에 있던 유리 천장을 깨뜨리는 일이다. 그건 바로 저항이다.


  깊이있는 저항은 부재하는 정의에 호소하는 것이고, 미래에는 그 정의가 세워질 거라는 희망과 함께한다. 하지만 이 희망이 저항이 이루어지는 첫번째 이유는 아니다. 누군가 저항을 하는 것은 저항을 하지 않으면 너무나 모욕적이고, 너무 왜소해지고, 죽은 것처럼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 저항을 하는 것(바리케이드를 세우고, 팔을 들고, 단식투쟁에 들어가고, 인간 사슬을 만들고, 소리치고, 글을 쓰는 것)은 미래가 무엇을 품고 있든 상관없이, 지금 이 순간을 지키기 위해서다.

  저항은 영(零)으로, 강요된 침묵으로 떨어지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따라서, 저항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순간에, 만약 이루어진다면, 작은 승리가 된다. 그 순간은, 다른 순간들처럼 지나가겠지만, 지울 수 없는 가치를 얻는다. 그 순간은 지나가지만, 이미 출력이 되었다. 저항의 본령은 어떤 대안, 좀 더 공정한 미래를 위한 희생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아주 사소한 구원이다. 문제는 이 사소한이라는 형용사를 안고 어떻게 시간을, 다시 살아갈 것인가 하는 점이다. (85-86쪽)


이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이 저항이 아니다. 저항은 바로 현재의 사소한 것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사소함은 삶에서 중요함이 된다. 저항을 하는 순간이 바로 사소함을 중요함으로 만든다. 그것은 저항하는 삶이 소중함을 잘 보여준다.


누구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남들에게서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은 사소함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내 삶이 지닌 사소함은 남들 눈에 비치는 사소함일 뿐이다. 내게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삶일 수 있다. 즉, 내 가치판단 기준으로 남을 판단해서는 안된다.


이 부분을 그렇게 읽게 된다. 그러므로 무슨 대의, 명분을 앞세울 필요가 없다. 그냥 내 삶이 요구할 때 저항하는 것이다. 


존 버거의 이 책은 '벤투의 스케치북'이란 제목을 달고 있다. 벤투가 뭐지? 하는 생각을 했다. 벤투라는 사람이 누굴까? 했는데, 스피노자다. 우리는 스피노자라고만 알고 있지, 그의 긴 이름을 알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베네딕투스(벤투) 데 스피노자라고 알려진 철학자 바루흐 스피노자(1632-1677)는' (11쪽)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에서 스피노자도 스케치를 했다고 한다. 존 버거는 스피노자와 이렇게 드로잉을 한다는 공통점을 말하고 있다.


단지 드로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는 스피노자의 글이 많이 나오고 있다. 존 버거의 그림과 글과 스피노자의 글이 어우러져 있다.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모습, 다른 사람과 함께 해야 함을 이 책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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