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를 쓰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예전에 학창시절에는 일기 검사라는 것이 있었다. 개인의 사적인 일을 적는 일기를 교사가 검사하는 것은 인권침해일 텐데, 그런데도 일기 검사를 한 이유는 무엇일까?
적어도 하루를 반성하라고? 하루를 되돌아보면서 정리를 하라고? 날마다 일기를 쓰면 자신의 생활을 자세하게 되돌아볼 수 있게 된다. 하루하루가 똑같은 날들의 반복같지만 일기를 쓰려다 보면 그 비슷한 날들 중에서도 내게 특별한 일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자연스레 일기를 쓰면 자신의 생활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고, 그냥 지나쳤던 일들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것을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게 된다.
한 문장 정도로 그쳤던 일기에 구체적인 표현들이 더해지면서 점점 길어지게 된다. 그만큼 자신의 생활이 다양해지게 된다. 아니, 삶이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아마도 그래서 학생 시절에 그렇게 학교에서 일기를 쓰라고 강제했는지도 모르겠다. 좋게 생각하자. 학생들의 사생활을 통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학생들이 자신들의 삶이 무척 풍부함을 깨달으라고 일기를 쓰게 했다고.
왜 일기 타령이냐고? 최승자 시집 제목이 '즐거운 일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시집은 절대로 즐겁지 않다. 우중충하다. 죽음이 넘쳐나고 있다.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다. 그게 삶의 비극이다.
하루의 죽음은 밤이다. 밤에 일기를 쓴다. 자신의 죽음 앞에서 삶을 되돌아보는 행위다. 물론 제목이 된 '즐거운 일기'는 그런 내용과는 상관이 없지만.
일기를 생각하면 그런 생각이 든다. 밤. 죽음. 정리.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은 시작. 끝이 아니라 시작. 그러므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또다른 시작. 하여 우리는 죽음을 향해서 계속나아가야 한다. 끝을 알면서도 가야 한다. 그게 비극이다.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는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삶.
누구나 삶에서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삶에서 조연에 머물고 만다. 자신은 주인공처럼 살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인류의 삶을 보면 조연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주인공처럼 살아야 한다. 그것도 비극이다. 주인공이 아닌데 주인공처럼 살아야 하는 삶이라니...
하지만 생각해 보라. 이런 평범함이 바로 우리 삶 아니겠는가. 일기를 통해서 삶의 작은 부분까지 찾아내어 의미를 부여하듯이, 우리들 평범한 삶에서도 충분히 주인공과 같은 삶이 있고, 절정에 이르는 삶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삶이다. 그러므로 최승자의 시 '비극'이란 시에서는 삶의 자세를 읽어야 한다.
비극
죽고 싶음의 절정에서
죽지 못한다, 혹은
죽지 않는다.
드라마가 되지 않고
비극이 되지 않고
클라이막스가 되지 않는다.
되지 않는다,
그것이 내가 견뎌내야 할 비극이다.
시시하고 미미하고 지지하고 데데한 비극이다.
하지만 어쨌든 이 물을 건너갈 수밖에 없다.
맞은편에서 병신 같은 죽음이 날 기다리고 있다 할지라도.
최승자, 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사. 2009년 초판 24쇄. 85쪽.
왜 비극일까? 비극은 뛰어난 개인이 세상과의 불화를 통해 파국으로 치닫게 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비극의 주인공은 뛰어난 사람이다. 그의 죽음은 '병신 같은 죽음' 이 아니라 '위대한 죽음'이다.
하지만 우리 대다수의 사람에게 죽음은 그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그래서 '병신 같은 죽음'이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위대한 죽음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나는 최선을 다해서 살아간다. 그것이 주인공처럼 사는 것은 아닐지라도.
일기를 쓰는 이유는 자신 삶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다. 일기에서 주인공은 바로 나다. 내가 세상과 불화한다면 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그렇게 내 삶의 주인공이 되는 것. 일기를 통해서 가능하다. 그렇다면 그것이 바로 '즐거운 일기'가 되지 않겠는가.
'즐거운 일기'라는 시와 전혀 상관없는 일기와 죽음, 일기와 비극에 관한 짧은 생각이었다. 시는 이렇게 다른 방향으로도 생각을 하게 해준다. 그래서 시를 읽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