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보다 더한 인생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그만큼 이야깃거리가 많다는 것이다. 왜 안 그러겠는가?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만나는 사람, 겪는 일들이 소설 속에 나오는 것들보다 많을 수밖에 없다.
소설은 그러한 삶들 중에서 작가가 표현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특정한 형태로 독자에게 전달하는 문학의 한 양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난해한 소설이라고 해도 삶보다는 난해하지 않다.
삶은 때로는 너무도 난해해서 도무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냥 자신이 살아낼 뿐인 삶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삶을 우리 모두는 살고 있다.
삶을 소설에 비유하면 단편, 중편, 장편이나 대하소설로 나눌 필요가 없다. 아무리 짧은 인생이라고 해도 그 속에는 대하소설에 나타나는 모든 요소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은 미완성일지라도 완결된 작품이라고 해야 한다. 또한 삶은 완결되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진행 중인 작품이라고 해야 한다.
우리 모두의 삶은 책이다. 자신이 걸어온 발자취가 담겨 있는 책. 이 책을 자신이 읽어도 되고,다른 사람이 읽어도 된다. 아니, 읽지 않아도 된다. 삶은 누군가에게 읽히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가끔 삶을 읽고 싶어진다. 도무지 답이 없는 것 삶을 읽어서 답을 찾고 싶어진다.
고재종 시집 [꽃의 권력]을 읽다가 '홀로 인생을 읽다'란 시를 읽으며 그런 삶책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다.
홀러 인생을 읽다
페이지 페이지마다 저항한다
재미없고 어렵고 빡빡한 이따위 책이라니
건성건성 지루함을 뛰어넘고
알 듯 알 듯한 문장만 마음껏 해석해 버린다
하지만 행간에 얼크러진 미로들과
딱딱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발을 거는 맥락의 숲이 부르는 유혹들
그 속으로 다시 길을 잃는다
피로 쓰였다니 온몸으로 읽어야지
나는 미련하고 오기 창창하여서
절벽에 부딪고 심연에서 소리 지른다
그 어떤 책도 저 혼자인 책은 없다지 않나
수많은 이미지의 난무와
겹겹 숨어 버린 의미들의 여러 시간
제기랄, 한 귀퉁이에서 잡념이나 낙서하다가
다시 페이지를 넘기면 삶의 황홀한 서정들
그다음 페이지엔 죽음의 혹독한 서사
생과 사는 앞뒷면으로 반복되는데
말도 안 되거나 말하기 싫어하는
정신분열증 환자의 담론처럼
말하고 싶으나 차마 말하지 못하는 것들의
징후까지를 짐작해 보는 시간은 깊고 깊다
이걸 혈투라고 해야 하나
혈투 끝 폐허라거나 숭고라고 해야 하나, 내게
주어진 고전(古典)이 의도하는 것과
의도하지 않는 것까지 가늠해 보는
독서는 마쳤는데 책은 여전히 펼쳐져 있다
고재종, 꽃의 권력, 문학수첩. 2017년. 82-83쪽.
이것이 바로 삶책 아니겠는가. 삶책을 덮을 일이 있을까? 내 삶이 끝났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언젠가는 내 삶책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기도 할 테니 말이다.
그러나 우선은 내 삶책을 읽기 전에 삶을 살아가야겠다. 내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바로 책 내용이 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