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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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 소설을 읽고 있는 중. [28]을 읽다. 제목이 무슨 뜻일까 생각하면서 읽는데, 단순하게 읽으면 감염병이 돌고 봉쇄된 화양이라는 도시의 28일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고립된 도시에서 겪게 되는 28일.

 

작가와의 인터뷰 기사를 보면 28은 여러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원제는 <화양 28> 이었어요. 화양이라는 단어가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빼기로 했어요.(웃음) ‘28’은 독자들한테 성질 나면 한번씩 이 제목을 읽어 보라는 배려라고 할까.(웃음) 그리고 2하고 8을 더하면 0이에요. 아무 것도 없는 제로 상태. 화양이라는 도시가 완전히 폐허가 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제로상황이 되는 걸 보여준다, 숫자적인 풀이는 그래요. 의학적으로도 28일은 뭘 할 수가 없는 기간이에요. 변종 바이러스가 나타나면, 원인균을 밝혀내는 데에도 오래 걸려요. 그걸 밝혀야 백신이니 진단키트가 나오는데. 에이즈 원인 바이러스를 밝히는 데에도 4년이 걸렸어요. 그러니까 28일은 살기 위해서 투쟁하는 기간이에요. 개와 인간이 살기 위해서 투쟁하고, 공명해 가는 시간

(출처:  http://news.kyobobook.co.kr/people/writerView.ink?sntn_id=7208)

 

소설은 중후반까지 굉장한 흡입력으로 나를 이끌었다. 읽으면서 여러 사건들이, 여러 소설들이 겹쳐 떠오르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카뮈의 [페스트]도 떠오르고, 사라마구의 [눈 먼 자들의 도시]도 떠오르고, 우리나라 광주민주화운동도 떠오르고, 지금 전세계가 겪고 있는 코로나19로 인한 판데믹도 떠오르고, 작가의 말에서처럼 구제역이나 조류독감으로 살처분을 당한 동물들도 떠오르고.

 

여러 사건들, 여러 소설들이 이 소설에 들어있고, 또 작가가 쓴 소설, [내 심장을 쏴라]에 나오는 인물도 나오기도 하고, 특이하게도 재난 상황이라면 인간 중심의 소설이라고만 생각하는데, 개가 화자로 나오기도 한다.

 

인수공통감염병이라는 빨간 눈의 괴질이라는 병에서 이상하게도 반공이데올로기가 떠오르고,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을 맹목적으로 격리시키는 힘이 있음도 생각하게 된다. 인수공통감염병이기 때문에 당연히 동물도 주인공이 되겠거니 했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 중 하나인 개 '링고'는 감염병이라기보다는 개를 괴롭히는 인간들에 저항하는 캐릭터로 등장한다. 

 

자신이 사랑하던 개 '스타'의 죽음을 이끈 인물들에게 복수를 하는 '링고' 여기에는 인간들의 잘못으로 인해 죽어가는, 또는 죽임을 당하는 동물들에 대한 연민이 드러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도, 소위 우리가 욕을 할 때 쓰는 '개만도 못한'이라는 표현이 무색하리만큼 링고는 뚜렷한 목표와 한없는 인내심을 지니고 행동하는 개로 나온다.

 

 

인간을 부끄럽게 하는 개다. 그러니 우리가 별다른 죄책감없이 살처분을 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를 소설을 통해서 생각하게 한다.

 

재난이 발생했다. 원인은 모른다. 질병에 걸리면 며칠 내로 죽는다. 어떻게 감염이 되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게다가 걸리면 대부분 죽는다. 이때 가장 간단한 방법은 봉쇄다. 대체로 감염병이 창궐할 때 하는 대책이다. 더이상 외부로 확산되지 않도록 하는 방법. 그러나 갇힌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지 않는 봉쇄는 혼란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극심한 공포 속에서 자신만은 살겠다고 몸부림치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치안은 붕괴된다. 치안이 붕괴되는 모습을 노수진이라는 간호사를 통해 잘 보여준다. 재난으로 인한 봉쇄, 대책 없는 봉쇄는 여성들에게 얼마나 고통으로 다가오는지를 노수진 간호사를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눈 먼 자들의 도시]에 나오는 약탈과 강간 장면이 연상되는 부분이기도 하고.

 

그럼에도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은 있다. 구급대 팀장인 한기준 같은 사람.그런 사람들을 통해 재난 속에서도 사람들은 견딜 수 있을지도 모른다. 봉쇄된 화양에서 사람들은 시청에 모인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를 의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공간이 시청 앞 광장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재난 상황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 광주민주화 운동 때 도청 광장에 모였던 사람들을 연상시키는 장면.

 

여기에 동물 편에 서 있는 서재형 같은 인물로 인해 동물을 무작위로 살처분하는 것이 얼마나 비인도적이고 감염병을 치유하는데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언론의 문제는 김윤주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데, 기사가 얼마나 큰 파급력을 지니는지, 또 한 사람의 인생을 파탄낼 수 있는지를 김윤주의 기사를 통해서 생각하게 된다. 여기에 사이코패스라고 할 수 있는 박동해.

 

작가는 박동해의 행동을 통해 우리가 감염병에 대처하는 방식이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생각하게 하고 있다.

 

이런 여러 가지가 복합되어 있지만 후반부로 가면 사건이 단순해진다. 링고의 복수, 군인들의 발포. 이것이 끝이다.

 

감염병이 어떻게 해결되는지, 정부는 어떻게 이 사태를 마무리하는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아니 보여줄 수가 없다. 그것은 살아남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다. 마치 광주민주화운동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것과 같이, 이 소설 역시 결말은 그렇게 미완으로 끝난다.

 

다시 생각하자. 극한의 재난 상황에서 사람들은 어찌해야 할까? 우리는 결코 고립되어 살아갈 수 없다. 재난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서로 돕는 모습을 통해 재난을 극복해갈 수 있다. 일방적인 통고나 혼란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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