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재(遍在)' 라는 말이 생각났다. 두러 퍼져 있음. 아니 도처에 있음. 없는 곳이 없음이라고 생각되는 말.

 

  없는 곳이 없다. 어디에나 있다. 부정하고 싶은데 부정할 수 없는 존재. 그것이 바로 독재자다.

 

  독재자!

  결코 좋은 감정으로 부르는 말이 아니다. 부정적인 감정을 담고, 어느 정도는 두려움도 담고, 빨리 사라지기를 바라면서 부르는 말이다.

 

  그런데, 독재자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편재하기 때문이다. 도처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독재자를 정치에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아니다. 독재자는 우리 삶 모든 분야에 널려 있다.

 

2015 현대문학상 수상시집을 읽다가 문정희 시인의 독재자에 대하여를 읽고 내게도 독재자가 있음을 생각하게 됐다.

 

나는 부정하고 싶은데, 그럼에도 나는 독재자다. 그것을 인정해야 했다. 문정희 시인의 시 중에 '내가 가장 예뻤을 때'라는 시 구절 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

 

'전쟁보다 더욱 정교하게 여성을 파괴시킨다는 / 결혼 외에는 어디에도 갈 데가 없었지 / 내가 가장 예뻤을 때' (2015 현대문학 수상시집 146쪽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사하는 독재. 결혼에도 이런 독재자가 있는데, 문정희 시인의 '독재자에 대하여'를 읽다 보면 정치에서 가정으로, 가정에서 자신으로 점차 범위가 좁혀지지만, 어디에나 존재하는 그런 독재자를 깨달아가는 과정이 시에 나타나 있다.

 

  독재자에 대하여

 

말벌처럼 허리 부러진 페닌술라!

이 반도의 아래쪽이 나의 고향입니다

독재자들이 철따라 출몰한 땅! 초등학교 때는

수업을 전폐하고 대통령 할아버지라는 글을 쓰기도 했어요

탱크를 밀고 나온 군인들이 새로 길을 만들고

선거를 악용하며 버티는 사이

나의 젊음은 최루탄 속에 시들어갔어요

북쪽에는 더 미친 독재자가 있다고 겁주던

노회한 독재들이었어요

문학을 했지만 문자옥(文字獄)이 두려워

무사하게 사는 법부터 터득했습니다

인간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서둘러 결혼 속으로 도망쳤지만

결혼 속에도 독재자는 있었어요

그는 더욱 난해한 모습으로 삶을 애무하며

지배와 행복의 명분을 세워나갔어요

혼자 때리고 혼자 깨어지는 무정란 같은 언어를 들고

비겁하게 침묵을 지키다가 가끔 모호한 시를 썼어요

속도와 물신 앞에 무릎 꿇지 않으려고 버둥거렸지만

시간의 검푸른 이끼 속으로 빨려 들어갔어요

이윽고 내 안의 늙은 독재자가 나를 덮쳤어요

 

문자옥(文字獄) : 지식인의 글을 꼬투리 잡아 탄압하는 것.

 

2015 현대문학상 수상시집(굴 소년의 노래). 2014년. 문정희, 독재자에 대하여. 147-148쪽.

 

괴물과 싸우는 자는 괴물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니체의 말을 인용할 것도 없이, 독재자의 나라에서 자란 사람들이 자연스레 가정에서도 독재를 체험하게 되고, 그것이 어느 순간 자신에게서도 독재자의 모습이 나타남을 인식하게 하는 시.

 

나이듦은 독재자에게서 멀어질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함이어야 하는데, 오히려 나이듦이 독재자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만의 성채에 갇혀, 나 아니면 안돼라는 생각을 지니게 되는 순간, 그는 독재자가 된다. 어느 분야에서든.

 

시인은 우리가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독재자를 제시하고, 그런 독재자가 실은 우리들 가정에서도 나타나고 있음을, 가정에서만이 아니라 개개인들 속에도 독재자가 있음을, 그래서 그런 독재자가 자신을 덮치지 않도록 해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결국 독재자란 닫힌 존재 아닌가. 나라를, 가정을, 나를 가두어 두려고 하는 순간 독재자는 나타난다. 그러니 열린 존재가 되어야 한다. 열린 존재란 바로 자신과 다른 존재 사이에 연결할 수 있는 문을 지니고 있는 존재다.

 

담이 아닌 문을 지닌 존재. 나에게 그런 문(門)이 있는지 이 봄에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고 있는 이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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