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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당신의 삶을 바꾸어야 한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삶을 위한 일곱 개의 주석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울리히 베어 엮음, 이강진 옮김 / 에디투스 / 2020년 2월
평점 :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물론 작가도 마음에 들었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얼마나 친숙한 이름인지, 윤동주의 '별헤는 밤'에 나오는 그 이름을 보고 그냥 친근하게 다가와 버린 시인. 또 소설가.
이 책은 그가 쓴 여러 글에서 삶에 관한 글을 발췌해 놓은 책이다. 경구들의 모음이라고 해도 좋은데, 모든 글들이 곱씹을 만하지만, 그래도 다섯 편의 문장을 골랐다.
그 글을 통해서 내 삶을, 거창하게 삶이라고 하지 말고 그냥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해 본다.
무언가를 창작한다는 것은 곧 무언가를 잉태하는 경험이며, 따라서 창작을 수행하는 자의 내밀한 경험이란 여성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42쪽)
여성적이라는 말. 생물학적인 여성이 아니다. 포용하는, 생산하는 존재를 의미하는 말이다. 그런 존재는 다른 존재들에 무심할 수가 없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가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여성성이 앞으로 우리가 지녀야 할 태도이기도 하다.
창작하는 사람. 다른 존재들을 무심히 넘기지 못하는 사람이다. 민감성, 예민한 심성을 지닌 사람. 사랑이 충만한 사람, 그런 사람이 창작하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런 여성성을 우리 태도로 삼아야 한다.
사회에서 대다수의 사람이 이런 여성성을 지니고 있다면 삶이 조금더 부드러워지고 따뜻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런 사람들은 군림하려 하지 않을 테다. 군림하지 않을 테니 자연스럽게 남들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리려 하지 않을 것이다. 사회 속에서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남에게 알리려 할 필요가 없다.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각인시키고자 하는 사람, 그 사람을 남성성이 강한 태도를 지닌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성성의 반대에 있는.
당신이 사람들 사이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다른 이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시간과 의지를 허비하시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도대체 누가 거기에 응하여 당신의 위치를 인정해 줄 수 있겠습니까? (53쪽)
그렇다.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 된다. 사람들 사이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사람은 남과 갈등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바로 경쟁의 논리, 승자의 논리다. 이러한 승자독식, 경쟁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에 대한 강박은 더 심해질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가 지닌 문제가 이것 아닐까? 그러나 승자독식, 경쟁 사회라고 해서 좌절에만 빠져 있어서는 안 된다.
심연 속에 도사리고 있는 경악스러운 것들 역시, 사실은 우리의 도움을 갈구하고 있는 가련한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94쪽)
우리를 경악하게 하는, 우리를 힘들게 하는 그러한 것들을 극복해 냈을 때 우리 삶이 더욱 풍요로워질 수 있다. 그렇다. 우리 사회를 승자독식, 경쟁 사회에 경악할 수 있어야 한다. 경악해야지만 그것에대응할 수가 있다. 그리고 경악한다는 것은 곧 우리가 이런 사회의 모습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얘기다. 바로 우리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학교다. 따라서 학교에서는 이런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학교가 제공해야 할 모든 앎은, 진심을 담은 것인 동시에 위대한 것이어야만 할 것입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에는 숨겨진 것이나 제약이 있어서는 안 되며, 아무런 의도도 가지지 않은, 감수성이 풍부한 교사에 의해 수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곳에서 다루어지는 모든 과목들은 특정한 대상이 아니라, 삶 자체를 다루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85-86쪽)
그런데 우리는 교육에서 삶 자체를 다루고 있는가? 아니다. 아니기 때문에 승자독식, 경쟁사회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를 경악하게 하는 이 현실을 바로 보아야 한다. 우리가 학교를 통해서 얼마나 아이들에게 부당함을 행사하고 있는지를.
지금 코로나19로 인해 개학 연기를 하고 온라인 개학을 한 것을 생각해 보라. 이런 사상 초유의 사태에 많은 사람들은 오로지 아이들 학업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를 고민한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살아갈 세상이다. 공부도 좋지만 왜 이런 감염병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는지, 이것들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학교가 할 일이다. 단지 지식 전수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우리나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오죽하면 스웨덴 청소년인 그레타 툰베리가 학교에 가지 않고 행동에 나섰겠는가. 행동하는 것이 학교에 가서 앉아 있는 것보다 더 필요하다고 느낀 툰베리.
좋든 나쁘든 간에, 부모들뿐만 아니라 학교 역시도 아이들에게 부당함을 행사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자기가 아이들에 깊이 숙고해 보았다 자부하는 그런 어른들이 제시하는 전제들에 기댐으로써, 잘못된 방식으로 아이들을 재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부모와 학교가 끝내 알지 못하는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아이들을 동등한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더없이 위대한 이들이 도달하고자 분투했던 목표라는 사실입니다. (104-105쪽)
릴케의 말처럼 아이들을 동등한 눈높이에서 바라보고 있다면 청소년이 기후 행동에 나서기 전에 이미 행동했어야 했다. 청소년들이 살아갈 세상을 우리가 살아갈 세상과 동등하게 본다면 어떻게 미래를 희생시켜 현재를 살아갈 수가 있단 말인가.
삶은 머리 속에 있지 않다. 삶은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삶은 행동일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을 하게 하는 글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