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자들 환상문학전집 8
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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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귄 작품이 지닌 매력에 빠져들고 있는 중이다. 사회를 다루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사회 속에 매몰되지 않고 개인이 지닌 중요성을 드러내고 있다. 정말로 '함께 또 따로, 따로 또 함께'라는 말이 이렇게 잘 들어맞는 모습을 그린 소설가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작품이 참 매력적이다.

 

이 소설 빼앗긴 자들을 읽는 시간은 행복한 시간이었다. 일종의 유토피아를 그리고 있는 소설이지만, 유-토피아라는 말처럼 없는 곳이 아니라 있는 곳이다. 번역을 '빼앗긴 자들'이라고 했는데, 영어 제목이 The Dispossessed로 되어 있어서 일 것이다.

 

내용으로 보면 우라스에서 아나레스로 이주한 사람들이 주인공이니 쫓겨난 사람들이 맞겠지만 소설을 읽어보면 빼앗긴 자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소유하지 않는 자들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우라스를 빼앗긴 것이 아니라 아나레스를 얻었고, 또 아나레스에서 오도주의를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나키즘이라고 할 수 있는 '오도주의자'들이 살고 있는 세상인 아나레스에는 원칙적으로 소유를 하지 않는다. 이때 소유라는 말은 돈을 주고 사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보면 된다. 이들은 필요한 물건을 가져오면 된다. 사회가 공급할 수 있을 한도 내에서. 돈이라는 개념이 없다. 필요하면 가지면 되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냥 주면 된다. 선물의 개념이라고 할까.

 

그러니 이들의 삶은 소유라기보다는 점유다. 필요할 때 점유했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주는 그런 생활방식. 그러니 소유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로 제목을 이해하면 소설을 더 잘 즐길 수 있다.

 

쉐벡이라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아 우라스와 아나레스라는 행성을 배경을 교차로 선택해 소설을 이끌어 간다.

 

아나레스를 떠나는 쉐벡으로부터 우라스에 도착한 쉐벡. 그리고 아나레스의 장면들은 과거 장면들이다. 우라스는 쉐벡이 겪는 현재이고. 이렇게 아나레스와 우라스가 교차하면서 시간도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면서 소설이 전개되는데... 읽어가면서 점차 쉐벡의 행동, 그리고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알아내게 된다.

 

우라스에서 착취를 없애고 자유롭게 살기 위해 저항하던 사람들에게 제공된 아나레스라는 행성. 그들은 척박한 아나레스에 정착해 살아가는데, 그런 아나레스의 삶은 아나키즘적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소유는 없고 점유가 있는 그런 생활들. 그러나 이들이 추구하는 세상은 완벽하지 않다. 이게 르 귄이 지닌 장점이다. 세상에 완벽이란 닫힌 공간이다. 르 귄은 닫힌 공간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나오는 벽이라는 말과 통하기도 하는데... 인물들은 끊임없이 벽을 통과하기를 추구한다.

 

쉐벡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벽을 그는 넘어서고자 한다. 벽 안에 갇히기를 거부한다. 그는 그런 의미에서 뼛속까지 오도주의자인 것이다.

 

(이 오도주의에 대해서는 아나키즘이라고 이해해도 좋다. 오도란 사람이 쓴 책을 중심으로, 그 사상을 중심으로 건설해 낸 별이 바로 아나레스고 그들을 움직이는 사상이 바로 오도주의다. 오도에 대해서는 르 귄이 쓴 다른 소설 '혁명 전날'에서 만날 수 있다)

 

그럼에도 오도주의자들이 모두 오도주의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일체의 권력을 부정하는 그 주의에서도 이상하게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들은 교묘한 방식으로 권력의 벽을 쌓는다.

 

이 소설에서는 사불이라는 인물이 그런 권력의 벽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는데, 사불만이 아니라 주인공 쉐벡의 어머니인 룰락 역시 벽을 넘어서지는 못하고 있다. 이상적인 사회라고 생각해도 그 사회가 마냥 행복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아나레스 행성을 통해서 작가는 잘 보여주고 있다.

 

나무들이 자랄 수 없는 먼지투성이 행성. 여기서는 물질적인 풍요는 기대할 수 없다. 물도 부족하고 가뭄이 들면 극심한 식량난에 허덕이게 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나아질 것이라 믿고 견뎌낸다. 서로 일하면서 서로 격려하면서. 하지만 이 아나레스에도 힘든 일에서 빠져나가는 사람도 있고, 식량 고갈이 문제가 될 때 식량을 탈취하려는 사람도 있다. 이들 역시 갈등을 겪고 있는 것. 다만 이 갈등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드러나는 것.

 

그 자체로 자족적인 생활을 해 나가는, 그래서 기껏해야 우라스에서 오는 화물선으로만 교류를 하는 (그것도 화물선이나 우라스인들은 벽 바깥으로는 나올 수도 없다) 그런 아나레스에서 쉐벡은 우라스로 간다. 배신자라고 할 수 있는 행동을 하는 것.

 

이유는 자신의 우주(물리)이론을 공유하고 싶은 것. 더 발전시켜 확정짓고 싶은 것. 그리고 우라스를 보고 싶은 것. 그가 도착한 곳은 아나레스와는 달리 식물들도 잘 자라고 각종 동물들도 있으며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는 우라스의 중심부다.

 

그는 우라스의 지배층 사이에 갇혀 지낸다. 그러다 우라스에서도 오도주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만나고 그들이 무력으로 진압당할 때 함께 있으면서 테라 대사관으로 피신해 다시 아나레스로 돌아오면서 소설은 끝난다.

 

풍족함을 희생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우라스. 그들에게 아나레스는 이상향이겠지만 쉐벡은 명확히 한다. 아나레스에도 고통이 있음을... 그것을 함께 해 나가고 있음을. 그것이 진정한 오도주의임을.

 

하여 소설은 닫힌 세계가 아니라 열린 세계를 보여준다. 완결된 세계가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세계를. 그런 과정으로서의 세계를 아나레스인인 쉐벡을 통해서 소설은 잘 보여주고 있단 생각이 든다.

 

우리가 추구하는 세상이 그림처럼 완결된 것으로 존재하지 않음을... 그곳에는 여전히 자유에 따른 책임이 있고, 그 책임에 대한 고통도 있음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누구나 다 똑같지 않음을.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쉐벡이 헤인 인이지만 아나레스에 내려 함께 살고자 하는 케토에게 하는 말... 그 말에 이런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지녀야 할 자세가 들어 있단 생각이 든다.

 

"아나레스에 가면, 일단 나와 함께 벽을 뚫고 걸어가면, 그러면 내 생각에 당신은 우리의 일원이 됩니다. 우리는 당신에게 책임이 있고 당신도 우리에게 첵임이 있지요. 당신은 다른 모든 사람과 같은 선택권을 지닌 아나레스 인이 되는 거예요. 하지만 그 선택권이란 안전한 것은 아니에요. 자유는 결코 그렇게 안전하지 않아요." (437쪽)

 

아나키즘을 그냥 무질서한 사회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소설을 꼭 읽어볼 필요가 있다. 아나키즘 사회가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이 소설만큼 잘 표현한 작품은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성과 사랑, 남녀의 역할, 일자리 배분 문제, 주거, 교육 문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타난 권력 문제,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은 어려움 속에 처했을 때 대응하는 여러 사람들의 모습 등등을 소설 속 아나레스를 통해 아나키즘 사회를 간접 경험할 수 있다. 무슨 주의로가 아니라 문학 속에서 생생한 삶의 모습으로 경험할 수 있으니...보통의 유토피아 소설과는 다른 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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