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전문학 11 - 임경업전 외
장덕순 지음 / 명문당 / 199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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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고전문학 하면 내용을 다 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 읽었다고 착각한다. 어렸을 때부터 여러 경로를 통해 들었기 때문에, 또 학교에서 배웠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실제로 다 읽은 경우는 별로 없다.

 

그냥 대충 아는 것과 제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것은 다르다. 고전소설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홍길동전이나 심청전, 춘향전, 흥부전만 해도 그냥 알고 넘어갈 뿐. 또 조웅전이나 류충렬전 같은 작품, 구운몽, 사씨남정기와 같은 작품도 마찬가지다.

 

제목을 알고 내용도 웬만큼 알기에 안다고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소설 중에서 '박씨전'도 마찬가지다. 허물을 벗고 미녀가 되고, 청나라 장수를 혼내주는 도술을 쓰는 여인. 전쟁으로 인한 상실감을 소설을 통해서 극복하고자 했다는 이야기. 남자가 주인공이 아니라 여성이 주인공이 되는 몇 안 되는 고전소설. 이렇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냥 넘어간다. 마치 다 읽은 것처럼. 하지만 다 읽어야 한다. 소설을 다 읽으면 더 많은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박씨전은 이시백의 아버지로부터 시작한다. 영웅소설의 기본 특징. 신이한 출생 아니던가. 이시백의 아버지는 출중한 사람이지만 오랫동안 자식을 낳지 못한다. 그래서 기도를 하고, 기도를 통해 아들을 얻는다. 이 아들은 태어나면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 영웅소설의 두번째. 탁월한 능력.

 

그러나 그는 시련을 겪어야 한다. 영웅소설의 세번째 역할. 시련과 극복. 이시백은 천하제일의 박색이라고 할 수 있는 박씨와 결혼을 한다. 지금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얼굴도 보지 못한 신부와 결혼하는 것. 오로지 아버지가 정혼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부인이 박색이다. 예나 지금이나 외모 중요하다. 오죽하면 박씨를 전신성형에 성공한 사례로 이야기하겠는가.

 

이 시련은 박처사라는 박씨 부인의 아버지라는 조력자를 통해 박씨가 탈을 벗으면서 해결이 된다. 개인적인 시련... 이상하게 여기까지는 박씨 부인이 주인공이 아니라 이시백이 주인공이다. 그를 중심으로 영웅소설의 모티브가 작동한다.

 

그렇다면 박씨 부인은, 우선 못생기게 태어난다. 신이한 출생. (세상에 미추가 신이한 출생의 기준이 될 수 있나, 그래서 세상에서 보아주지 못할 박색이라고 하는데, 시아버지 되는 사람은 그런 박씨의 외모를 문제삼지 않는다. 그는 앞부분에서 박씨의 조력자다) 박씨 부인은 뛰어난 재주가 있다. 탁월한 능력. (비록 언급만 되고 있지만, 말이나 연적에 관한 이야기에서 잘 드러난다. 이 부분에서부터 박씨가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시련 및 극복. (남편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후원에 건물을 짓고 피화당이라고 이름 짓는다. 화를 피하는 곳. 이때 화는 병자호란이다. 나라로 보면 그렇다. 하지만 시어머니와 남편으로부터 구박을 받지 않는 곳이라는 의미도 있어야 한다. 이게 시련이다. 곧 조력자를 만나 극복하게 된다. 허물을 벗은 것. 미녀가 된다. 그리고 부부 사이가 좋아진다)

 

자, 이시백과 박씨 부인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여기까지다. 이들의 시련은 모두 극복되었다. 쌍둥이 아들까지 낳고 행복하게 사는 일만 남았으니까.

 

그렇지만 소설이 여기서 끝나면 별 의미가 없다. 영웅소설은 개인의 문제를 사회, 나라의 문제로 확장해 가는 데서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나라의 고난이 나온다. 전쟁을 겪게 되는 것. 병자호란이다. 이미 진 전쟁. 역사적 사실까지 바꿀 수는 없다. 그렇다면 가상의 인물을 등장시켜 복수해야 한다. 용홀대다. 용골대 동생으로 나온다. 박씨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존재. 또 왕대비가 끌려가는 것을 막는다. 세자와 대군들만 청나라로 가게 된다.

 

시련이다. 극복이 나와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래서 마련한 것이 잡혀간 세자와 대군을 데려오는 것. 임경업이 사신으로 가 모셔온다. 여기서 당시 사람들의 사고가 드러난다. 세자는 금은보화를 가지고, 대군은 백성을 이끌고, 막내 대군은 그냥 가고 싶다고 말한다. 

 

당시는 소현세자가 왕위를 물려받지 못하고 봉림대군이 효종이 된 상태. 북벌론이 기승을 부리고 있던 때. 그렇다면 누가 인정받는 왕자가 되어야 하는가? 호왕이 선물을 준다고 말해보라고 했을 때 이들의 답은 당시 지배층이나 백성들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어야 한다.

 

북벌? 백성을 위한 왕자는 세자가 아니라 봉림대군이다. 그가 곧 효종이다. 이것이 당시 주류의 생각이다. 이 소설에서도 역시 그렇게 표현이 된다. 비슷한 시기를 다루고 있는 [임경업전]에서도 이 내용은 변하지 않는다.

 

자, 이게 극복방법이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청나라의 발전된 문물을 받아들여 내부적으로 발전을 해서 청나라와 비슷한 또는 청나라를 극복하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 복수의 방법으로 채택되지 않는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소현세자와 같이 발전된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신들의 과거로부터 한발 물러나 세상의 발전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한다.

 

한데 당시 양반들에게는 그런 눈이 없다. 있어도 탄압당한다. 말을 못한다. 백성들 역시 마찬가지였겠지. 이런 모습을 [박씨전]은 잘 드러내고 있다. 그 다음에는 임경업의 죽음... [박씨전]에서 임경업은 후반부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임경업전]에서는 그 전말이 더 자세하게 묘사되고. 그래서 [박씨전]과 [임경업전]은 함께 읽으면 좋다.

 

[박씨전]에서 그 신통력 있는 박씨가 임경업의 죽음에 대해서는 모르쇠한다. 신통력을 발휘하지 않는다. 이시백 역시 마찬가지다. 그냥 관망한다고 보는 편이 옳다. 물론 임경업에 대해서는 옹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어떤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이런 뒷이야기가 굳이 있어야 하나 싶다. 그럼에도 임경업의 최후에 대해서 [임경업전]도 아닌 [박씨전]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임경업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만, 여기까지다. 더이상의 행동은 없다.

 

영웅소설의 마지막은 대업을 이룬 다음에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다. 잠자는 듯이 죽었다는 표현. 여성이 주인공이 되는 이 소설도 앞과 뒤는 이시백이 주인공이 된다. 박씨는 중요한 역할을 못한다. 다만, 소설의 중간, 전쟁이 일어나기 전과 일어난 다음에 신통력으로 활약하는 박씨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이렇게라도 여성 영웅을 등장시키고 있다. 난세에는 영웅이 필요하다. 그것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하지만 어떻게든 해결이 된 상태에서는 이런 여성 영웅은 필요하지 않다. 박씨전의 뒷부분에서 박씨가 그다지 큰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은 이런 이유다. 더이상 여성들의 힘을 살려줄 수가 없는 상태. 아직 우리 사회는 갈 길이 멀었던 것이다.

 

박씨전은 여기서 멈춘다. 그래도 이런 여성 영웅이 있었다는 것, 이것은 나중에 난세만이 아니라 평시에도 여성들이 삶의 중심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이 된다. 일상에서의 여성 영웅이 나오기 위해서는 더 많은 세월을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지금 이 시대에도 여성 영웅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그만큼 이 사회는 덜 발전한 것이다. 고전을 읽는 이유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보기 위해서이기도 하니...

 

박씨가 겪었던 일들을 과연 지금 여성들이 겪지 않고 있는가? 이들도 박씨처럼 허물을 벗든지, 아니면 자신을 이해해 줄 조력자를 만나든지 해야 하나 생각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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